1. 프로필
깃발 : 로고
약칭 : NATOOTAN
표어 : Animus in consulendo liber
설립 : 1949년 8월 24일
본부 : 벨기에 브뤼셀 #
회원국 : 12개국(발족 당시)32개국(현재)
공용어 : 영어, 프랑스어
사무총장 : 옌스 스톨텐베르그
군사위원회 의장 : 롭 바우어 제독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 토드 월터스 공군대장
2. 개요
유럽이나 북미에 있는 어느 일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공격이 있을 경우 유엔헌장 제51조에서 인정한 독자적 또는 집단적 방위권한을 행사하여 각 회원국들은 집단적 또는 독자적으로 공격받는 국가를 상호원조한다.
NATO 헌장 제5조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北大西洋條約機構)는 1949년 창설하여, 냉전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북미와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의 군사 동맹이다.
본부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위치하며 수장은 노르웨이 前 총리인 옌스 스톨텐베르그. 소련 붕괴 이후에도 나토는 해체되지 않았다.
소련이 붕괴되긴 했으나 체제만 붕괴된 것인데다 일부 위성국가들이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분리된 점만을 제외하고는 소련 국토 자체는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은 러시아로 국명만 바뀐 채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나토 존재의 필요성이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수용하여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특히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헝가리 같이 소련에 대해 이를 갈던 이들 국가들은 냉전이 종식된 이후 곧바로 나토에 가입한다.
여기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그동안 중립을 표방해 비회원국으로 있던 스웨덴과 핀란드까지 가입을 했다.
흔히 쓰이는 두문자어인 NATO는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줄임말로,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 게르만어군에 속한 나라에선 NATO로 읽지만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루마니아 등 로망스어군에 속한 나라에선 'Organisation du Traité de l'Atlantique Nord'를 줄인 OTAN으로 읽는다.
본래 게르만어군에서 문장을 '사과 두 개'라는 형식으로 읽는다면, 로망스어군에서는 '두 개의 사과'라는 형식으로 읽는다.
때문에 특정 국적이 아닌 나토군 소속으로 참전하는 병력이나 공동소유하는 기체의 경우 NATO-OTAN이라는 식별문을 써 넣기도 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국방 선진국들 대부분이 NATO에 가입되어있다보니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군사 기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수준의 강력한 국방력을 자랑한다.
3. 냉전과 창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의 물밑 작업으로 1~2년 사이에 동유럽이 모두 공산화되자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1948년 연합국이 4분할 점령하고 있던 패전국 독일에서 군정을 끝내고 총선을 통해 새로운 민주 정부를 만들어 독립시키는 방안에 대해 미, 영, 프 측과 소련의 대립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이 독일의 화폐인 라이히스 마르크화를 일방적으로 평가절하시키자, 미, 영, 프는 서독 지역에서 마르크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미, 영, 프 3개국 점령 지역이 소련을 배제한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 마르크화가 서베를린에도 유통되자 소련은 이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베를린을 모두 차지할 목적으로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당시 서베를린은 동독 한복판에서 수십만명의 소련군과 동독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소련은 서베를린에 대한 모든 물자 및 전기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아사 위기에 처한 서베를린이 소련과 동독에 굴복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미국을 필두로 영국,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 호주 등 서방 국가들은 베를린 공수작전을 펼치며 220만 서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막대한 생필품을 수송기를 통해 실어날랐다.
베를린 봉쇄로 소련의 팽창주의와 군사적 위협이 서방으로까지 확대되자 위협을 느낀 서유럽 국가들은 군사적 동맹을 창설하기로 긴급히 합의하고, 이에 베를린 봉쇄가 진행 중이던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 조약이 조인되어 나토가 창설되었다.
8월 24일부터 조약의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4월 4일을 창설일로 본다.
NATO 창설 국가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등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북미와 중부 유럽 국가들 중심으로 협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베를린 봉쇄로 위기감을 느낀 북유럽과 남유럽 국가들도 대거 참여를 희망해오면서 창설국이 늘어나서 중립국(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 대부분이 NATO 창설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1952년 2월 18일 그리스와 터키가 가입했다.
터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가 도래하자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던 소련의 강력해진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서구 진영에 편입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터키는 지체없이 UN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을 결정했다.
서구 사회로부터 한국전쟁 참전의 공로를 인정받은 터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 국가임에도 NATO에 가입이 승인되었다.
1955년 5월 9일 그동안 가입 여부가 쭉 논의되어 오던 서독이 공식적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NATO는 소련에 대항하는 서방의 군사동맹이지만 초기에는 그러한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다.
소련은 유럽의 안보에 이바지하고 싶다며 1954년 3월 나토 가입을 신청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절된 것도 아닌 당시 회원국 간 격론 끝에 반려되었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소련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일단은 게오르기 말렌코프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섰고 그 밑에서 스탈린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차기 후보들의 암투가 벌어졌다.
권력을 두고 경쟁관계인 이들이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스탈린 시절에서 벗어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도 풀고, 서방과의 긴장 관계도 풀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농업, 경공업도 양성해서 조금은 살만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굴라크 수용자들을 석방하고 북한, 중국을 압박해서 서둘러 6.25 전쟁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소련이 나토 가입 신청 의사를 내비친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며 1954년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도 소련에 대한 변화와 개방에 대한 기대가 잠시 있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소련의 권력 암투는 베리야의 처형 이후 흐루쇼프가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는 것으로 빠르게 정리되어 갔고, 이후 소련은 동유럽의 민주화 움직임을 탄압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등 냉전이 더욱 첨예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NATO는 1955년 5월 9일, 5년간 미뤄졌던 서독의 NATO 가입을 승인했고, 그러자 소련은 NATO가 반공 동맹을 형성했다고 맹비난하면서 불과 닷새 후인 5월 14일,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모아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했다.
이 바르샤바 조약기구 멤버 국가들 중 상당수가 소련 붕괴로 인한 냉전 체제 종식 이후 나토로 갈아타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날 때까지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 조약기구(WP)와 대립하는 사이였으나 양측이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다행히 한 번도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프랑코에 의해 중립국을 표방했던 스페인은 그의 사후 1981년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1982년 5월 30일 NATO에 가입하였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고, 당일부로 동독군이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탈퇴함과 동시에 서독의 독일연방군에 흡수 통합되어 NATO에 흡수되었다.
소련제 무기 일색인 구동독군이 NATO에 들어오면서 그동안 서방 국가들과 전세계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궁금해 하던 각종 소련제 무기들이 점차 베일을 벗고 실제 성능이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적지 않은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실망하기도 했다.
NATO군의 실전 참전은 냉전 시기에는 일어나지 않았고, 냉전이 끝난 후 90년대 지옥도가 펼쳐졌던 유고 내전 당시 그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코소보 전쟁 때 결국 NATO군이 개입했다.
4. 탈냉전
1990년대 초에 냉전은 끝났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1991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냉전이 끝나가면서 동독이 소멸하고 독일이 통일될 때, 미국과 소련은 NATO의 영역을 당시(1990년 수준)에서 확장하지 않는다는, 명문화되지 않은 약속을 했다.
관련 기사그러나 이와는 달리 NATO는 동유럽으로 확장되어갔다.
미국이 처음부터 NATO 확장에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임기 초인 1993년 6월 10일 NATO 외무장관들과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의 대표로 나온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는 "언젠가 적절한 시기에 나토를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의 의제는 아니다("In appropriate time, we may choose to enlarge NATO membership. But this is not now on the agenda.”)라면서 나토의 확장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나토의 확장보다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나토의 확장은 자동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나토와 러시아간 완충지대(buffer)로 설정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994년 1월 11일에 개최된 백악관 각료들과 중부 유럽 외무장관들과의 회의에서, 러시아의 팽창에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외무장관이 나토에 즉각적으로 가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지만 백악관 각료들은 이에 대해 러시아가 개혁에 성공해서 좋은 곰(good bear)이 될지, 아니면 팽창주의적인 나쁜 곰(bad bear)이 될지 지켜보자'면서 이들 국가의 나토 가입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입장을 바꾸고 NATO를 동유럽으로 확장했다.
빌 클린턴 정부가 나토 확장론으로 급격히 기울게 된 원인으로는 다음이 있다.
- 폴란드나 체코, 헝가리 등 이미 소련 시절 러시아에 호되게 당한 중부 유럽 및 동유럽국들이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해서 엄청난 염증을 느끼며 끈질기게 NATO가입을 요구했다.
이들 나라가 소련(러시아)에 원한을 가지게 된 계기는 큰 사건만 대충 살펴봐도 카틴 학살, 프라하의 봄, 부다페스트 공방전, 헝가리 혁명 같은 것들이 있다.
- 보스니아 전쟁처럼 NATO가 아닌 나라에서 전쟁과 대량학살 사태가 벌어졌을 때 미국과 NATO가 무력하게 아무런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없었다.
- 소련이 무너지고 세워진 러시아 연방의 혼란도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체첸 전쟁처럼 러시아와 그 주변국과의 갈등이 현실화되었는데 러시아가 이 갈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또한 1993년 12월 거행된 러시아 총선거에서 러시아 극우주의 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최대 의석을 차지했다.
- 1994년 12월 실시된 미국 상원, 하원 선거에서 나토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던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을 싹쓸이함으로써 나토 확장 정책을 펼치는 것은 미국 국내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런 미국의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했던 것은 독일의 수상 헬무트 콜이었다.
재밌는 점은 헬무트 콜 역시 처음에는 나토 확장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94년 1월 개최된 나토 회의에서 헬무트 콜은 "동유럽국들에게 지원은 해줄 수 있지만 나토 가입은 허용할 수는 없다"면서 공개적으로 나토 확장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 이유는 다음이 있다.
-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한 대량 인종학살과 그로 인한 난민 발생이 독일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도 보스니아 난민이 쏟아졌기 때문. 1994년 12월 5일 헬무트 콜과 빌 클린턴 사이의 진행된 회담에 따르면 보스니아 전쟁 등 유고슬라비아에서 촉발된 분쟁과 민족학살로 인하여 독일에는 이미 40만명의 난민이 온 상태였다고 한다.
다.
- 콜은 친서방파인 당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헬무트 콜이 빌 클린턴과의 회담에서 얘기한 에피소드로, 러시아가 분쟁중인 국가에 폭격을 계속하자 헬무트 콜은 보리스 옐친에게 전화를 걸어 폭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한다.
보리스 옐친은 이에 응하여 폭격을 당장 멈추었지만 24시간이 지나자 폭격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때 헬무트 콜은 보리스 옐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 군부가 보리스 옐친의 통제를 점차 이탈하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헬무트 콜 역시 빌 클린턴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나토 동진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99년 3월(체코, 헝가리, 폴란드)과 2004년 3월(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두 차례에 걸쳐 구 동구권 국가들이 NATO에 합류했다.
2009년에는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가 NATO에 가입했으며, 2017년 몬테네그로, 2020년에 북마케도니아가 NATO에 가입했다.
5. 신냉전
전세계에 신냉전의 시작을 알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냉전 시기 중립국의 위치를 지켰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2022년 가입했다.
또한 나토는 대서양을 넘어서서 태평양에 있는 나토의 잠재적 적국과 대결하기 위해서 협력을 추진할 가능성도 존재하며 실제로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6. 회원국
- 1949년 가입 영국 미국 캐나다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프랑스 - 프랑스는 1966년 NATO 통합군에서는 탈퇴하였다가 2009년에 재가입했으며, 탈퇴 후에도 (준) 회원국 지위는 유지했다.
프랑스의 핵개발이 마찰의 원인이었다.
1990년대에 회원국으로 재가입했고, 1995년 NATO 군사위원회에 재가입했으며, 2009년 4월에 NATO 통합군에 재가입했다. - 영국
- 미국
- 캐나다
- 덴마크
- 아이슬란드
- 이탈리아
- 벨기에
-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 노르웨이
- 포르투갈
- 프랑스 - 프랑스는 1966년 NATO 통합군에서는 탈퇴하였다가 2009년에 재가입했으며, 탈퇴 후에도 (준) 회원국 지위는 유지했다.
프랑스의 핵개발이 마찰의 원인이었다.
1990년대에 회원국으로 재가입했고, 1995년 NATO 군사위원회에 재가입했으며, 2009년 4월에 NATO 통합군에 재가입했다.
- 1952년 가입 그리스 튀르키예
- 그리스
- 튀르키예
- 1955년 가입 독일
- 독일
- 1982년 가입 스페인
- 스페인
- 1999년 가입 체코 폴란드 헝가리
- 체코
- 폴란드
- 헝가리
- 2004년 가입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 불가리아
-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 루마니아
- 슬로바키아
- 슬로베니아
- 2009년 가입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 알바니아
- 크로아티아
- 2017년 가입 몬테네그로
- 몬테네그로
- 2020년 가입 북마케도니아
- 북마케도니아
- 2022년 가입 핀란드 스웨덴
- 핀란드
- 스웨덴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일랜드는 중립국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회원국이 아니다.
아일랜드는 중립국 표방에 더해 영국과의 북아일랜드 분쟁을 이유로 가입하지 않았다.
7. 평화를 위한 동반자국
Partnership for Peace. 줄여서 PfP라고도 한다.
냉전 해체후 NATO가 비(非) NATO국가들과 체결한 파트너쉽 협정이다.
NATO와 파트너국간에는 훈련, 교육, 재난대처, 과학, 환경 등에 관한 군사적 교류를 수행한다.
빌 클린턴 등 미국 정치인에 의하여 제안된 이 아이디어는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천재적(genius)이라는 극찬을 받았는데 유럽 내에 또다른 경계를 설정하지 않으면서도 평화를 추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토국과 비나토국을 대등한 동반자(partner) 관계로 설정시키는 점에서 러시아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만약 러시아가 NATO에 진짜 가입하게 된다면, 러시아 군대는 다른 나토국 군대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으로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되는데 이는 러시아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폴란드, 체코, 헝가리처럼 러시아에 강한 위협을 느껴 하루빨리 NATO에 가입하고자 했던 동유럽국가들은 NATO에 정식 가입되기에 앞서 PfP관계를 통하여 NATO와 군사적 교류를 트는 것으로서 NATO에 소속되고자 했다.
이후에도 NATO에 가입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인 루마니아, 발트 3국,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등은 일단 PfP에 가입하는 것으로 NATO와 관계를 텄고 차후 정식으로 NATO에 가입함과 동시에 PfP를 탈퇴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처럼 PfP 회원국간 NATO에 대한 태도가 달랐기 때문에 1994년 당시 미국과 러시아가 PfP를 어떤 성격이라고 이해하고 서로를 이해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다소 있는 편이다.
백악관 기밀해제자료 참고. 후일 NATO와 러시아간 관계가 나빠졌을 때도 NATO와 러시아는 PfP관계로서 많은 교류를 수행했다.
속내야 어떻든 양자가 표면에 내세우는 명분은 어디까지나 평화였기 때문에 '평화를 위한 동반자적 관계'를 굳이 대놓고 거부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0년과 2020년에 NATO 해군과 러시아 해군은 합동훈련을 수행하였는데l 이는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과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 발생한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2021년~2022년중에는 NATO와 러시아관계가 최악이 되었다.
2021년 10월, 러시아는 모스크바내 NATO 사무실을 폐쇄하고 NATO는 브뤼셀에서 러시아 외교관 8명을 추방했다.
그리고 2022년 2월부터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러시아는 여전히 PfP의 멤버로서 NATO의 파트너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냉전 체제 해체 이후 해빙 무드를 타고 생성되었던 PfP였던만큼 유럽내 및 중앙아시아내 군사적 긴장이 높아짐에 따라 점차 존재감이 희석되고 있으며 자금 지원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줄고 있어서 앞날이 밝지 않은 편이다.
아래는 현재 PfP 회원국이다.
- 러시아 (1994년 6월 가입)
- 몰도바 (1994년 3월 가입)
- 몰타 (1995년 4월 가입후 탈퇴, 2008년 3월 재가입)
- 벨라루스 (1995년 1월 가입)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006년 12월 가입)
- 세르비아 (2006년 12월 가입)
- 스위스 (1996년 12월 가입)
- 아르메니아 (1994년 10월 가입)
- 아일랜드 (1999년 1월 가입)
- 우크라이나 (1994년 2월 가입)
- 우즈베키스탄 (1994년 7월 가입)
- 조지아 (1994년 3월 가입)
- 카자흐스탄 (1994년 5월 가입)
- 키르기스스탄 (1994년 6월 가입)
- 타지키스탄 (2002년 2월 가입)
- 투르크메니스탄 (1994년 5월 가입)
참고로 키프로스와 코소보 역시 각각 2011, 2012년에 PfP에 가입 신청을 하였으나 다른 NATO 구성국(터키, 그리스, 루마니아, 스페인 등)의 반대로 보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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