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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유관순 柳寬順|Ryu Gwan-s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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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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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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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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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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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9월 28일 (향년 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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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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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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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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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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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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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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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유계출, 오빠 유우석,
남동생 유인석, 유관석 |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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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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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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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 재학 중 순국)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 |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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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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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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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공로훈장 단장 추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019년) |
1. 개요
2. 생애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재학 중에는 교내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때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 간다.
그러나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이는 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유관순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가 아니라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을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연합뉴스 2019년 3월 8일자 기사 - ② 유관순 열사 고문·순국에 대한 사실 왜곡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과 위인전 등지에서 거의 전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유관순 시신 훼손설을 언급했다.
유관순이 생전 다녔던 매봉교회 지하전시실에서는 석유 상자 사진이 유관순 시신을 담은 거라고 설명했다.
이에 언론인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신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고 주장했다.
참고.결국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유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
비슷한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가 있다.
유관순이 아우내(併川;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지휘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 운동의 아이콘적인 존재로 유관순을 지목해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훗날 미군정청 경무부장, 민주당 당수 등을 지낸 유석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이다.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現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되었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짓고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한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참고 사진 1 2 1974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졌으며, 1985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재학 중에는 교내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때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 간다.
그러나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이는 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유관순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가 아니라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을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연합뉴스 2019년 3월 8일자 기사 - ② 유관순 열사 고문·순국에 대한 사실 왜곡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과 위인전 등지에서 거의 전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유관순 시신 훼손설을 언급했다.
유관순이 생전 다녔던 매봉교회 지하전시실에서는 석유 상자 사진이 유관순 시신을 담은 거라고 설명했다.
이에 언론인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신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고 주장했다.
참고.결국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유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
비슷한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가 있다.
유관순이 아우내(併川;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지휘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 운동의 아이콘적인 존재로 유관순을 지목해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훗날 미군정청 경무부장, 민주당 당수 등을 지낸 유석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이다.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現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되었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짓고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한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참고 사진 1 2 1974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졌으며, 1985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
3. 서훈 격상
2019년 2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로 추서할 것을 의결하였다.
상훈법상 훈장은 같은 공적으로 중복 수여할 수 없으나,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별도의 공적으로 인정하여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하기로 하였다.
정식 추서는 2019년 3월 1일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장에서 훈장을 유족에게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만 3등급 훈장도 결코 낮거나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닌데도 서둘러 격상해 버린 모양새이다.
유관순의 서훈 격상 논의에 학계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서울신문 2019년 2월 18일자 기사 - ‘유관순 서훈 격상’ 딜레마에 빠진 정부 정책서울신문 2019년 2월 13일자 기사“한국의 잔다르크” “인기로 정하나” 유관순 서훈 등급 어쩌나“유 열사를 선열로서 기리겠다는 것은 얼마든지 반길 일이지만, 훈격을 바꾸겠다는 것은 형평성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석주 이상룡(1858~1932)도 3등급이다.
유관순을 높이면 이런 분들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것이다.
모든 체계가 뒤집히게 된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청와대와 보훈처의 논리는 결국 '유명세 = 광복과 민족단결과 인권의 가치에 기여'라는 것. 사후에는 행적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생전의 공적으로 서훈을 결정하는 체계에선 형평성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신중론 자체는 26일 격상 이후에 새삼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다.
시민단체와 지역정계의 격상 요구/학계의 신중론은 꾸준히 대립했고, 3.1절 100주년 격상 이슈는 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가 “이번 3·1절을 맞아 유 열사의 서훈을 상향 조정하면 국민께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는 취지의 대화를 나눴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중앙정계서 현실화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대토론회가 2월 13일에 열렸다.
그러나 이 토론회에서도 서훈 격상 반대 측의 발표가 나오자 매국노 운운하며, 야유로 뒤덮이는 바람에 제대로 된 토론조차 되지 않았다.
보훈처는 다른 독립운동가도 국민적 열망이 있으면 격상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인기와 지명도로 격상을 결정했다는 사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평가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것과 유관순 서훈 격상은 별개의 문제인데 이를 동일시하며 변명하는 것이다.
격상 후에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에는 언론의 말 바꾸기도 한몫했다.
이 서훈 격상이 이뤄지기 전 언론에선 “유관순이 겨우 3등급에 머물고 있다”라며 지적했다가, 이후 등급을 격상하자 형평성을 지적하며 말을 바꾸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SBS 2019년 2월 23일자 기사'3·1 운동 상징' 유관순 열사가 3등급?…또 논란된 서훈다.
상훈법상 훈장은 같은 공적으로 중복 수여할 수 없으나,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별도의 공적으로 인정하여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하기로 하였다.
정식 추서는 2019년 3월 1일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장에서 훈장을 유족에게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만 3등급 훈장도 결코 낮거나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닌데도 서둘러 격상해 버린 모양새이다.
유관순의 서훈 격상 논의에 학계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서울신문 2019년 2월 18일자 기사 - ‘유관순 서훈 격상’ 딜레마에 빠진 정부 정책서울신문 2019년 2월 13일자 기사“한국의 잔다르크” “인기로 정하나” 유관순 서훈 등급 어쩌나“유 열사를 선열로서 기리겠다는 것은 얼마든지 반길 일이지만, 훈격을 바꾸겠다는 것은 형평성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석주 이상룡(1858~1932)도 3등급이다.
유관순을 높이면 이런 분들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것이다.
모든 체계가 뒤집히게 된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청와대와 보훈처의 논리는 결국 '유명세 = 광복과 민족단결과 인권의 가치에 기여'라는 것. 사후에는 행적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생전의 공적으로 서훈을 결정하는 체계에선 형평성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신중론 자체는 26일 격상 이후에 새삼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다.
시민단체와 지역정계의 격상 요구/학계의 신중론은 꾸준히 대립했고, 3.1절 100주년 격상 이슈는 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가 “이번 3·1절을 맞아 유 열사의 서훈을 상향 조정하면 국민께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는 취지의 대화를 나눴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중앙정계서 현실화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대토론회가 2월 13일에 열렸다.
그러나 이 토론회에서도 서훈 격상 반대 측의 발표가 나오자 매국노 운운하며, 야유로 뒤덮이는 바람에 제대로 된 토론조차 되지 않았다.
보훈처는 다른 독립운동가도 국민적 열망이 있으면 격상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인기와 지명도로 격상을 결정했다는 사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평가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것과 유관순 서훈 격상은 별개의 문제인데 이를 동일시하며 변명하는 것이다.
격상 후에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에는 언론의 말 바꾸기도 한몫했다.
이 서훈 격상이 이뤄지기 전 언론에선 “유관순이 겨우 3등급에 머물고 있다”라며 지적했다가, 이후 등급을 격상하자 형평성을 지적하며 말을 바꾸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SBS 2019년 2월 23일자 기사'3·1 운동 상징' 유관순 열사가 3등급?…또 논란된 서훈다.
4. 과대평가설
유관순이 자신이 한 업적에 대비에 너무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의견과 부정하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다.
다.
4.1. 과대평가 근거
유관순이 훌륭한 활동을 한 건 맞지만, 3.1 운동 당시와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무명의 참가자였다.
1945년까지 발행된 모든 신문기사에서 유관순의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다.
오히려 여성 독립운동가 중 1920~30년대 근우회나 여성동우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대 이름이 알려졌던 신여성 엘리트들이 많다.
유관순은 1947년부터 갑자기 국내 신문에 자주 등장하며, 영웅 서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유관순은 해방 이후 누군가의 적극적인 발굴에 의해 순국의 아이콘이 된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과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신봉조가 박인덕에게 “이화학당 출신 중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하였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박인덕도,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대포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500여 명이다.
유관순 열사 역시 운동을 이끌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나머지 7,500여 명의 열사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박은식의 주장 외에 일본 측의 기록을 보아도 3개월간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으로 나온다.
유관순은 저 중 사망자 혹은 부상자가 아닌 구금자 46,948명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유관순이 사망한 것은 일제의 3.1운동 진압과정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된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28일이다.
유관순이 훈장을 받는다면, 그에 앞서 3.1 운동 중 사망한 7,509명에게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훈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7,509명의 사망자 안에는 유관순의 부모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사람은 건국훈장 애국장(4급)을 추서하였다.
죽은 부모님은 4등급 훈장, 살아남은 딸은 1등급 훈장이다.
독립운동 과정 중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일본 경찰에 잡혀서 옥사한 사람에게 더 높은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유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3년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나, 3.1 운동은 오히려 민족대표 33인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신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시 천주교 내 보수파는 "안중근 의사처럼 거물도 하나 못 죽였는데, 열교(개신교)들은 미화가 너무 심하고 우린 천주교 내 친일경력도 반성했다.
"라고 주장했다.
불교 보수파 측은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을 한 것이 맞는데, 친일파라고 음해받고 불교의 독립운동사는 왜 말이 없고, 왜 기독교는 유관순 열사만 띄우냐?"라고 했다.
실제 4.1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인원 선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반해, 유관순은 3.1 운동의 상징처럼 굳어져 버렸다.
1945년까지 발행된 모든 신문기사에서 유관순의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다.
오히려 여성 독립운동가 중 1920~30년대 근우회나 여성동우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대 이름이 알려졌던 신여성 엘리트들이 많다.
유관순은 1947년부터 갑자기 국내 신문에 자주 등장하며, 영웅 서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유관순은 해방 이후 누군가의 적극적인 발굴에 의해 순국의 아이콘이 된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과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신봉조가 박인덕에게 “이화학당 출신 중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하였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박인덕도,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대포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500여 명이다.
유관순 열사 역시 운동을 이끌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나머지 7,500여 명의 열사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박은식의 주장 외에 일본 측의 기록을 보아도 3개월간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으로 나온다.
유관순은 저 중 사망자 혹은 부상자가 아닌 구금자 46,948명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유관순이 사망한 것은 일제의 3.1운동 진압과정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된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28일이다.
유관순이 훈장을 받는다면, 그에 앞서 3.1 운동 중 사망한 7,509명에게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훈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7,509명의 사망자 안에는 유관순의 부모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사람은 건국훈장 애국장(4급)을 추서하였다.
죽은 부모님은 4등급 훈장, 살아남은 딸은 1등급 훈장이다.
독립운동 과정 중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일본 경찰에 잡혀서 옥사한 사람에게 더 높은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유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3년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나, 3.1 운동은 오히려 민족대표 33인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신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시 천주교 내 보수파는 "안중근 의사처럼 거물도 하나 못 죽였는데, 열교(개신교)들은 미화가 너무 심하고 우린 천주교 내 친일경력도 반성했다.
"라고 주장했다.
불교 보수파 측은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을 한 것이 맞는데, 친일파라고 음해받고 불교의 독립운동사는 왜 말이 없고, 왜 기독교는 유관순 열사만 띄우냐?"라고 했다.
실제 4.1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인원 선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반해, 유관순은 3.1 운동의 상징처럼 굳어져 버렸다.
4.2. 그녀와 달리 잊힌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보다 독립운동 경력이 긴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제치고 유관순이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이 된 건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화학당 1회 졸업생 중 한 명인 신마실라는 주활동지역이 미국이며 미주한인의 자금조달 등의 활동을 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태영은 독립운동도 했고 심지어 국내 최초의 여성변호사이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 섰는데, 예를 들면 3.1 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서 회장은 김마리아가, 부회장 겸 총무는 황애시덕이 맡았다.
한국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허정숙은 사회주의, 그것도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광복 후엔 아예 북한으로 갔으니 내세울 수가 없다.
(허정숙은 게다가 보수적인 일제강점기에 화려한 연애사로 입방아에 오르내린 여성이다.
) 주세죽은 3.1운동에 참여한 엘리트 혁명가인데 박헌영과 김단야의 아내라는 점과 빼어난 미모로만 알려졌다.
권애라는 3.1 운동 후 유관순과 같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는데, 심지어 남편이 의열단 단원 김시현이다 보니, 해방 후 이승만 암살미수자의 아내를 추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조이, 이애라, 최복순 등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현앨리스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을 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의용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김명시 장군도 알려지지 않았다.
김명시의 경우 광복 직후 유명세가 대단해서 백마를 타고 서울을 행진하자 서울시민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김명시 장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또한 경성트로이카(=이재유 그룹)는 남녀 활동가 비율이 비슷한 독립운동조직으로 일제강점기 여성 최장기간 수감자인 박진홍, 일제감시대상카드가 가장 많은 이순금, 이효정, 이병희 등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언급된 독립운동가는 모두 1945년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당연히 이들 여성 독립운동가 모두 잔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묻혔다.
이병희는 트로이카로 잡힌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고춧가루 물고문, 전기고문, 단근질을 통한 성고문 등을 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순결하고, 정치색이 없고, 기독교 집안이고, 20살에 장렬하게 죽어 까일 점이 1도 없는 유관순이 발탁된 꼴이다.
유관순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발탁된 과정에는 여러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는 점, 1945년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옥을 반복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지금 전혀 기억되지 않는 여성들도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만약 유관순이 살아서 1920~30년대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면 결코 지금 같은 애국 아이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1920년대 신여성엘리트로 활동했을 수도 있고, 1920년대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그랬듯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는데, 그랬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없다.
예를 들면 이화학당 1회 졸업생 중 한 명인 신마실라는 주활동지역이 미국이며 미주한인의 자금조달 등의 활동을 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태영은 독립운동도 했고 심지어 국내 최초의 여성변호사이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 섰는데, 예를 들면 3.1 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서 회장은 김마리아가, 부회장 겸 총무는 황애시덕이 맡았다.
한국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허정숙은 사회주의, 그것도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광복 후엔 아예 북한으로 갔으니 내세울 수가 없다.
(허정숙은 게다가 보수적인 일제강점기에 화려한 연애사로 입방아에 오르내린 여성이다.
) 주세죽은 3.1운동에 참여한 엘리트 혁명가인데 박헌영과 김단야의 아내라는 점과 빼어난 미모로만 알려졌다.
권애라는 3.1 운동 후 유관순과 같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는데, 심지어 남편이 의열단 단원 김시현이다 보니, 해방 후 이승만 암살미수자의 아내를 추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조이, 이애라, 최복순 등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현앨리스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을 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의용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김명시 장군도 알려지지 않았다.
김명시의 경우 광복 직후 유명세가 대단해서 백마를 타고 서울을 행진하자 서울시민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김명시 장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또한 경성트로이카(=이재유 그룹)는 남녀 활동가 비율이 비슷한 독립운동조직으로 일제강점기 여성 최장기간 수감자인 박진홍, 일제감시대상카드가 가장 많은 이순금, 이효정, 이병희 등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언급된 독립운동가는 모두 1945년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당연히 이들 여성 독립운동가 모두 잔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묻혔다.
이병희는 트로이카로 잡힌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고춧가루 물고문, 전기고문, 단근질을 통한 성고문 등을 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순결하고, 정치색이 없고, 기독교 집안이고, 20살에 장렬하게 죽어 까일 점이 1도 없는 유관순이 발탁된 꼴이다.
유관순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발탁된 과정에는 여러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는 점, 1945년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옥을 반복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지금 전혀 기억되지 않는 여성들도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만약 유관순이 살아서 1920~30년대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면 결코 지금 같은 애국 아이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1920년대 신여성엘리트로 활동했을 수도 있고, 1920년대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그랬듯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는데, 그랬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없다.
4.3. 과대평가 부정
훈장의 형평성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종교 논란 등은 반박이 있다.
향토사학자 임명순은 2014년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화학당 측에서는 오히려 유관순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유관순의 조카 유제한이 대한민국 최초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에게 제보를 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박인덕을 비롯한 이화학당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의도적으로 띄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히려 이들은 유관순을 외면했다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와 함께 유관순 열사 재조명에 나선 소설가 전영택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인 것은 맞다.
심지어 전영택은 유관순전의 내용 대부분이 박인덕의 진술에 의존해 집필하였다고 밝혔다.
이 전영택이 집필한 ‘유관순전’이 박창해가 만든 국어교과서에 실리게 되면서 유관순이 널리 알려진 건 분명한 사실.다.
향토사학자 임명순은 2014년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화학당 측에서는 오히려 유관순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유관순의 조카 유제한이 대한민국 최초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에게 제보를 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 임 씨의 주장에 따르면 박인덕을 비롯한 이화학당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의도적으로 띄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히려 이들은 유관순을 외면했다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와 함께 유관순 열사 재조명에 나선 소설가 전영택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인 것은 맞다.
심지어 전영택은 유관순전의 내용 대부분이 박인덕의 진술에 의존해 집필하였다고 밝혔다.
이 전영택이 집필한 ‘유관순전’이 박창해가 만든 국어교과서에 실리게 되면서 유관순이 널리 알려진 건 분명한 사실.다.
5. 여담
- 생존했던 유관순의 이화학당 동창들이 “얼굴이 너무 다르다”며 지적하자 가운데와 오른쪽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이다. 실제 인물은 청초하고 갸름한 얼굴이었다고 하니 감옥에서 받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3.1 운동 1년 전 사진을 보면 동일인임을 의심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얼굴은 아니다. 얼굴 윤곽이 동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유관순이 징역 3년이라는 형량을 받으면서 정말 고문을 받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제의 법령에 따르면 여성은 법정최고형이 7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유관순은 징역 7년을 받고 들어간 것이었고 이것은 현대로 따지면 무기징역과 똑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당대 일본 제국은 근본적으로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보통선거와 인권 신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실현된 것은 훗날 미군정기이다. 또한 당대 공판 기록 등을 볼 때도 사상범 부부가 같이 기소되는 경우 여자는 형집행정지로 나오는 경우도 무척 많으며 이런 점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공훈 정리에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성에 대한 처우가 괜찮았다는건 결코 아니며 이런 식으로 법적으로 대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동일 범죄를 저질러도 여성에게 관대하게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전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아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고 낮은 지위에 대한 배상책의 일환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사실 1920년대나 1930년대 초반의 신문을 보면 단순한 절도 내지는 참고인 조사 과정에서도 나체 고문 내지는 고문치사, 성적인 학대로 인한 자살 사례가 보도될 정도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등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 민족계 신문들을 검색해 보면 오히려 한국의 1980년대 이상으로 자세한 고문 고발 기사가 다이쇼 시대에는 버젓이 실렸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신문에 잘 안 나거나 갑자기 사망식으로 은폐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보면 유관순에 대한 무서운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조갑제의 회고에 따르면 3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도 경찰서에 고춧가루통을 가지고 가는 순경들이 많았다고 한다.
- 5만원권에 들어갈 여성 인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신사임당에게 밀렸다. “얼굴이 퉁퉁 붓고, 수심이 가득찬 얼굴이라 고문 받기 전 사진을 찾기 힘들어서”라고 밝혔다. 유관순 외에도 김구 선생이 들어갈 10만원권은 아예 발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 유관순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도 만세를 불렀다는 건 비중을 별로 두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으며 부모가 모두 진압 군경의 총칼에 사망했음에도 잘 다뤄지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소녀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상징성 때문이리라 추측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아우내 만세운동 부분에는 유관순이 아니라 진압 군경에 총에 맞고 팔이 잘리고 머리가 절단난 다른 남자를 주로 다루고 있다. 단, 여기서 같이 잡혀간 사람 중에 이화학당 출신의 학생이 있다는 기록으로 이게 유관순이라고 본다. 사실 유관순의 부친인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고향에 학교를 세워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가였다. 일찍 감리회에 입교한 개신교 교인이기도 하여 마을 유지들과 협력해서 교회도 세워 교육과 계몽 활동에 힘을 기울인 인물인데 유관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 또한 독립운동가로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되었으며 공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유관순과 잠시 해후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사망 이후에도 유우석은 활발히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독립을 본 후인 1968년 5월 28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노환으로 소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2010년 초,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초등학교 교과서 4학년에 수록된 유관순 전기를 삭제하려 했다가 다행히 유관순 관련 단체 및 여론의 반발로 삭제는 취소되었다.
- 유명 인터넷 논객 김완섭은 2003년에 낸 저서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통해 유관순이 폭력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며 '여자 깡패'라는 비난을 했다. 이에 유관순의 조카 유제우가 소송을 걸어 2011년에 대법원은 그가 유관순이 주도한 시위는 폭력적이었다고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유관순에 대한 판결문 및 번역본 판결문에 의해 '당시 시위는 평화 시위였음'이 확인되는 바 김완섭의 기술은 '허위 사실 적시'에 해당되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700만원 벌금형에 처한다고 판결하였다(2008도3120). 그러나 유관순이 ‘여자 깡패’라는 김완섭의 표현은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하지만 국내 형법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어도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유관순 동상 건립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해당 기사에서 나오는 김활란은 스승이라는 도시 전설이 있는데 그녀는 이화학당 시절 선배로 유관순과의 나이는 5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실제 스승은 박인덕이다. 박인덕도 3.1 운동 후 여러 가지 활약을 했지만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당연히 친일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것을 별도로 하더라도 고위층과의 연애 플래그나 세계 일주 등으로 화제를 일으킨 여성이었다. 유관순이 각광받으면서 유관순의 스승으로 같이 인식된 건 친일반민족행위자이던 박인덕이나 여러 작자들이 자신들의 더러운걸 숨기고 유관순 찬양과 같이 지들을 미화하기 위한 게 컸다. 실제 1990년대 어린이 위인전기에는 아예 박인덕을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도 나왔다. 소설 화수분으로 유명한 소설가 전영택도 친일 행위를 하던 걸 숨기고자 유관순과 알던 사이라는 걸 늘 강조하며 자랑하기도 했다.
- 한국의 개신교계에서는 그녀를 개신교계 영웅으로 생각하나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그녀와 이화학당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 친구였지만 뒤에는 불교로 귀의하고 비구니가 된 보각스님이 회고하기를 알려진 것과 달리 짓궂은 면이 있었다고 한다. 유관순이 기도할 때 하나님 대신 명태님, 굴비님이라고 붙여 기도하며 킥킥거린다든지 친구들과 모여서 “예수님은 춥겠어. 벌거벗은 채로 늘 매달려 있잖아?”라는 말에 “뭐 그래야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 관심을 기울일 테니 춥다고 불쌍히 여길 것은 없어”라는 말을 했다고 하나 그녀의 나이가 어린 10대의 어린 소녀였음을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또래다운 발언이다. 보각스님의 주장만으로 그녀가 신앙적이었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만 보면 유관순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그녀의 가족은 모두 개신교 교인이었으며 천안 병천면 지역의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아버지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녀는 개신교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다녔고 서울에선 정동제일감리교회에 출석했으며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나 잔 다르크를 뽑았다. 보각스님의 회고가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정기적인 신앙 생활을 한 개신교인이지만 짓궂은 면이 있었고 신앙 생활에도 딱히 예외는 아니었다 정도가 되겠다. 다만 보각스님의 회고 이외에는 딱히 근거가 없는 것이 문제.
- 당시 이화학당의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교복이 유관순의 상징으로 굳어져 흔히 유관순 교복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이 한복을 흔히 입는다고. 그러나 북한에서는 유관순 자체를 모른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해방 이후 유관순이 재조명된 것은 1947년 이후 남한에서만 한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남한의 유관순처럼 중요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첫 번째가 다름 아닌 국부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이고, 그 다음이 허정숙이다.
- 2014년 8월 한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이 누락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언론 일각에서 국정교과서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고교 국정교과서 모두를 확인해도 그 어느 책에도 유관순이 없었다. 확인해 본 바에는 6차교육과정에 ‘각주1 부분에 유관순 열사의 순국’ 부분 간략히 기술한 부분이 있긴 하다. 두산동아, 금성출판사, 천재교육, 미래앤 4종의 교과서이다.
- 대한민국 해군은 2015년 3월 1일 손원일급 잠수함 6번함의 함명을 유관순함이라 명명하였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한국 해군함의 함명으로 결정된 것이다.
- 유관순의 이화학당 시절 친구로 2010년 4월 3일 106세의 나이로 사망한 남동순 할머니가 있는데, 유관순 열사가 사망한 이후 독립운동 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1945년 8월 14일에도 작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고아원을 세웠다.
- 2015년 6월 서울게임아카데미에서 주최한 ‘게임 컨셉아트 공모전’에서 수상한 수상작이 유관순 열사를 성적 대상화한 것으로 밝혀져 뒤늦게 논란이 되고있다. 미니스커트 입은 유관순 열사? 게임 아카데미 수상작 논란
- 2018년 3월 28일(현지 시간) 뉴욕 타임스(NYT)가 유관순 열사에 대한 부고기사를 총 8페이지에 걸쳐 게재했다.
- 유관순의 고향인 천안에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체육관이 있으며 현재 V-리그 남자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쌍용2동의 충무병원 앞에 위치해 있다. 여담으로, 동상이 있는 인도에서 횡단보도 2개를 건너면 2019년 초에 있었던 천안 라마다호텔 화재사고가 일어났던 그 호텔이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천안시의 상징인 구 마스코트 횃불낭자, 신 마스코트 나랑이 역시 누구를 묘사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천안시를 연고로하는 천안 시티 FC의 마스코트인 나랑이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판 EBSi 수능특강 한국사 영역의 표지 모델로 사용되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더 많은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구한말의 의병장 윤희순, 영화 밀정의 실제 모델인 남자현, 김마리아 박자혜, 권기옥, 차경신, 박차정, 등등. 좌파 계열로는 먼저 조선의용대에서는 대단한 활약을 해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린 김명시 장군이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이재유 그룹)는 남녀 활동가 비율이 비슷한 독립운동조직으로 여성 최장기간 수감자(12년)인 박진홍, 이효정, 이병희, 이순금 등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활동했다. 그 외 수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다.
-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꼽아 보면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3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역시 이화학당 출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박인덕이 앞장서서 유관순 열사의 3.1 운동 업적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이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숨겨진 인물들이 많이 있어서 이화학당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대표적인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 3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것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심지어 이화여자대학교에는 아직도 김활란의 동상이 있다.
- 그녀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이화학당 인근의 버스정류소인 ‘서대문경찰서.농협은행’을 ‘서대문경찰서.농협은행.유관순 활동 터’로 병기한다.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5절에도 등장한다.
- 집안 전체가 개신교 집안이라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믿게 되었다. 천안에서 살 때는 온 가족이 매봉교회에 출석했고 이화학당에 입학한 이후에는 정동교회에 나갔다. 사실 정동교회가 이화학당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라 이화학당의 학생들과 선교사들은 주일이 되면 이 교회를 나갔다. 당시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가 설교 중에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을 자주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유관순은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매봉산에 올라가 한 기도가 유명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자주 기도를 하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개신교에 대해 이야기해 유관순에 감명을 받아 개종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20년 순국한 뒤 당시 이화학당의 룰루 플라이 교장은 개신교식으로 유관순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당시 장례 예배는 손정도 목사가 집례했다. 현재도 개신교에서 개신교 독립운동가로 큰 비중과 명성을 차지하고 있으며 개신교계는 유관순에 대한 추모 예배를 자주 올리기도 한다. 2015년 유관순의 신앙적인 면을 다룬 영화 <소녀의 기도>가 개봉했고 2019년 3월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유관순의 동상 앞에서 헌화 예배를 하기도 했다. 유관순 열사는 영국 선교사로 부터 daks 로퍼를 선물받아 독립운동 참여시 항상 착화를 했다고 전해진다.
- 복역 기간 중 겪은 혹독한 고문과 구타로 인해 갈비뼈와 척추뼈, 골반뼈 등 몸을 지탱하는 모든 뼈가 박살났으며 그녀가 죽기 전 이뤄진 마지막 가족면회 당시 이미 걷거나 일어서는게 힘들 정도로 단 1년 만에 몸이 처참하게 망가졌다. 또한 폐와 간,신장,방광 등의 주요 장기도 파열되거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1920년 9월 30일 예정대로 출소가 이뤄졌다고 해도 후유증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독립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는 영국에 의해 투옥되었을 당시 자신처럼 인도의 총리를 지내는 자신의 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옥중 편지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의 3.1 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의거를 극찬하며 일본 제국 역시 영국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식민지 조선인들과 유관순 열사의 행동을 본받을 것을 딸에게 주문했는데, 이 편지는 세계사 편력이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출간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라는 타이틀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 2022년 8월, 30대 남성이 인천의 한 중학교 운동장 국기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에 유관순 열사에 대한 욕설을 써 국기를 모독하고, 일장기를 대신 건 혐의로 검거되었다. '유관순 XXX' 태극기에 욕설, 중학교 국기게양대에 일장기 건 30대 영장 기각
6. 대중매체에서
- 영화감독 윤봉춘은 1948판, 1959, 1966년 총 3차례에 걸쳐 <유관순>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윤봉춘은 ‘유관순 전문 감독’으로 불렸다. 유관순 역은 고춘반(1948년판), 도금봉(1959년판), 엄앵란(1966년판)이 각각 맡았다.
- 1974년 개봉한 영화 <겨레의 꽃 유관순>에서는 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이던 배우 문지현이 맡았다.
- 1994년에 만들어진 국산 애니 <초롱이의 옛날여행>에서 목소리는 성우 정미숙이 맡았다.
- 2013년 나온 모바일게임 <독도디펜스>에서 현대 복장으로 어레인지되어 등장했다.
- 2019년 2월 개봉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는 배우 고아성이 연기했다.
- 2019년 3월 개봉한 영화 <1919 유관순>에서는 배우 이새봄이 연기했다.
- 2019년 9월에 유튜브에 공개된 애니메이션 <횃불 : 내 이름은 유관순>에서는 이새아 성우가 목소리를 연기했다.
7. 관련 단체
-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 유관순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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