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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홍상수
洪尙秀 | Hong Sang-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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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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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25일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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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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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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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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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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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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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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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독, 각본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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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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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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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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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 / 학사 중퇴)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 (예술학 / 학사 졸업)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대학원 (영화학 / 석사 수료) 시카고 예술대학교 대학원 (영화학 / 석사 졸업) |
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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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영상영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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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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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홍의선, 어머니 전옥숙
2남 1녀 중 셋째, 슬하 1녀 |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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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혜(1985년 결혼 / 2016년 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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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각본가, 교수.세계 10대 영화제 수상 이력을 보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로테르담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2010년 《하하하》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 2020년 《도망친 여자》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감독상)', 2021년 《인트로덕션》으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각본상)', 2022년 《소설가의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 수상했으며,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최우수 작품상)을, 2017년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김민희에게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허나 국내에서는 2016년 6월 21일에 공식적으로 기사화된 김민희와의 불륜으로 인해 논란을 겪었으며 끝내 2017년 3월 13일 공식석상에서 스스로 김민희와의 관계를 인정했다.
허나 국내에서는 2016년 6월 21일에 공식적으로 기사화된 김민희와의 불륜으로 인해 논란을 겪었으며 끝내 2017년 3월 13일 공식석상에서 스스로 김민희와의 관계를 인정했다.
2. 활동
모호하게만 알려져 있으나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스스로도 잘 말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그의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이게 그의 유년기에 얼마나 강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홍 감독은 1960년대 영화 제작자 부부인 홍의선(父), 전옥숙(母)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 홍의선은 육군 중령 출신 영화 제작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제작 스튜디오를 설립한 사람이다.
전옥숙은 영화, 방송 제작자로 후지TV의 서울지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대쪽 같은 성미와 호탕함, 리더십으로 따르는 사람도 많았던 듯.1968년 경향신문에 실렸던 사진흥미로운 것은 부부가 각자 정치적 성향이 굉장히 달랐다.
홍의선은 아무래도 군 장교 출신이니 보수 우익 성향이었지만, 전옥숙은 교수 리영희가 누님이라고 깍듯이 존경했고, 특히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할 정도로 진보적 인사로 유명했다.
그러나 호탕한 성격으로 우익 인사들에게도 우호적이었기에 2015년 7월 9일에 전옥숙이 85세로 세상을 떠날 당시 뉴데일리가 꽤 긍정적인 기사를 내며 명복을 빈다는 글을 썼다.
어쨌거나 전옥숙이 시인 김지하의 뺨을 칠 정도로 괄괄한 성격에, 밤에 술 마시다가 YS를 부르면 YS가 금방 나타났다고 할 정도로 워낙 당대의 정치-문화 계통으로 마당발이라, 굉장히 요란한 집안 환경에서 자랐다.
전옥숙이 매년 연말에 주최하는 송년회는 대한민국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함께하는 자리로 유명했으며, 그녀의 사망 전인 2010년대까지도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부부가 해방-한국전쟁 후 겨우 다시 싹트던 근현대 문화의 핵심 인물들이었으니 잘 사는 집안도 집안이지만 집안이 갖는 문화-예술적인 권력과 특권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오! 수정》 당시 부잣집 도련님들의 심리와 행태에 관한 살아있는 디테일은 멀리서 온 게 아닌 듯 싶다.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지만 어릴 때 방황했으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음주와 비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편해지긴 하지만 확실히 이 시절의 경험이 그를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듯. 부모의 이혼 후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자신을 반평생 괴롭혔다고 술회하고 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밤낮없이 술독에 빠져 살았으며, 어디에도 잘 속하지 못하고 도덕적-문화적 결벽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책도 읽어보고 나름대로 사회가 권하는 방안(지금으로 치면 처세술이나 자기계발 같은 내용)을 열심히 시도해보았지만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자신은 자신대로 고통스러웠다.
그때서야 자신의 타고난 기질을 인정하면서 모든 통념과 틀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자기만의 직관적인 눈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만 거의 몇 년이 걸렸다고. 그의 가치관 중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어쨌든 그래서 대학도 갈 생각없이 빈둥거리던 중, 작곡이나 해볼까 했는데 입시 기간을 놓쳐서 포기하고 다시 빈둥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친구인 연극연출가 오태석이 "너는 연극 연출하면 잘 어울리겠다"라는 권유를 듣고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해서 연극 연출을 배우려 했으나 강압적인 분위기와 무기력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1년 만에 자퇴한다.
이 당시의 그는 굉장히 소심하고 연약하고 감성적이었다고 술회한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혼자 학교 앞 술집에 앉아서 한없이 답답함에만 빠져있는 자신의 상태만 생각난다니 학교가 꽤나 싫었던 듯하다.
결국 그는 미국에 도피성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와 시카고 예술대학교에서 공부한다.
거의 10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는데,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모두 이 시절 확립되었을 정도로 중요하고 치열했던 시기였다고 한다.
미국 유학 시절에 영화 말고도 미술, 문학, 음악 등 전반적인 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가 사랑해 마지 않는 예술가들(세잔, 지드), 미국의 대문호들(벨로, 헤밍웨이) 등은 모두 이 시기 때 탐닉한 걸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 결혼도 했다.
25살 때인 1985년에 동갑내기 여자와 결혼을 했다.
부인이 미국 영주권자(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병역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영화에 눈을 뜨고 영화를 파기 시작한 것은 20대 후반이나 돼서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 달려가는 씨네키드도 아니였던 모양. 대학 졸업과제로는 실험영화 '개미 쳐다보는 여인'과 '사과 먹는 여인' 등을 찍었다.
말 그대로 개미보는 여자와 사과먹는 여자를 롱테이크로 찍은 실험영화였다.
원래 사과 먹는 여인은 고기 먹는 여인이었는데, 모델이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뒤늦게 사과로 바꿔서 찍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제출 기간에 턱걸이로 냈고, 그 외에 기간도 오로지 생각과 구상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의 기질과 즉흥성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1991년 프랑스 파리에 1년간 체류하기도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홍상수가 프랑스 예술 영화 극장 시네마테크에 다녔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홍상수 본인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 프랑스 영화가 아니라 옛날 미국 영화만 보러 다녔다고 한다.
이후 그의 아내가 파리 생활에 합류해서 애 보는 일도 함께 했다고 한다.
30줄에 들어선 나이인 1992년에 한국에 돌아온 홍상수는 어머니가 설립한 '시네텔 서울'에 들어가 PD 생활을 하였다.
SBS에서 방영했던 다큐 《작가와 화제작》이 홍상수가 만든 프로그램.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발표하며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구효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특이한 서사를 보여주는 편집기법으로 발표되자마자 비평계에 충격을 주며,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홍상수는 일약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특히 정성일의 경우는 엄청난 극찬을 했는데, "1996년이 나와 한국영화계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은 홍상수, 김기덕, 임순례의 데뷔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평론을 썼다.
당시 그들의 영화는 상업적 히트작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그 해보다 시간이 몇 년이나 지나서도 다른 평론에 또 저 이야기를 썼다.
무려 20년이 지난 뒤에도 정성일은 홍상수 최고의 작품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서슴없이 꼽는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무려 송강호의 영화 데뷔작이다.
주인공의 대학 친구로 한 장면밖에 안 나오는 단역이었다.
이후 1998년《강원도의 힘》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분에 초청되어 프랑스 비평가들을 사로잡았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나리오 교수로 임명되어 몇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절에 졸업한 영화과 학생들의 졸업 작품이 모두 홍상수화되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이후 2004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으며, 2005년에는 《극장전》으로 칸 경쟁 부분 연속 진출에 성공했다.
(이기우 인터뷰 기사) 결국 2010년 <하하하>로 63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받게 된다.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인 황금표범상을 받았는데 이는 1989년 배용균이 감독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후 26년 만에 한국 영화로 이 상을 받은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국제영화제-아시아 쪽 영화제 빼고 서구권-에서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대상을 받아 당시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던 영화였다.
더불어 2020~2022년까지 3년 연속으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한국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3년 연속 수상한 감독이기도 하다.
지금도 꾸준히 영화 만들고 있는 중이지만 흥행 부진 탓인지 사재를 털어서 만든다거나, 상업 스폰서가 아닌 지자체에서 투자를 받아서 찍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제작비를 정말 들이지 않기로 알려졌고 흥행부진도 쫄딱 망한 수준이 아니며 프랑스 영화계의 지속적인 푸시 덕인지 홍상수의 명성이 갈수록 쌓이고 영화 연출 스타일에 반한 영화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출연함으로써 제작비 절감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노 개런티로 출연한 배우들의 목록을 보면 그야말로 위엄이 쩐다.
고현정을 시작으로 김태우, 정유미, 문성근, 이선균, 김상경, 유준상, 하정우, 정재영, 김상중, 문소리, 엄지원, 예지원, 김강우, 김규리, 윤여정, 김주혁, 권해효, 이기우 등 독립/예술영화 진영에선 찾아보기 힘든 캐스팅이다.
이 캐스팅 자체가 정말로 순수하게 홍상수 영화에 대한 헌사도 있지만, 자신의 필모에 거장의 작품을 넣고 싶어하는 배우들도 있고 또 출연 이후 잘 풀리는 배우들이 많다.
출연했던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홍상수 영화를 하고 나서 매너리즘 타파, 연기가 늘었다는걸 후에 체감한다고 한다.
또한 홍상수 감독 영화 특성상 롱테이크를 찍는 장면이 많아 대사를 외우기 힘들거라고 여겨지지만 생각보다 잘 외워져서 배우들 스스로 놀란다고 한다.
이는 감독이 배우들을 평상시에도 관찰해서 배우들 위에 비슷한 성격의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표현하기 때문인거 같다고 이동진은 평했다.
대표적으로 배우 김의성의 경우 홍상수의 데뷔작의 주인공으로 주목받아 활동했으나 세월이 지나 영화계에서 잊혀졌다가 북촌방향에서 기용된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김상중, 권해효 등 잊혀졌던 중견 배우들이 재조명을 받고 다른 영화들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홍상수 영화의 경우 촬영기간이 다른 상업영화에 비해 굉장히 짧고 스피디하기 때문에 스케줄만 맞으면 해볼 만하고 연출, 촬영 스타일이 갖는 독특함과 어려움 때문에 영화배우 입장에서 상당한 도전이 되고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어서 상당수의 배우들이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씩 다시 출연하니 홍상수 감독과 배우 모두가 윈윈하는 결과가 된다.
2012년 개봉작 《다른 나라에서》의 주연 배우인 이자벨 위페르 역시 노 개런티로 촬영했다.
한국에 올 때 수행원 1명도 없이, 가방 하나만 끌고 인천국제공항에서 촬영지까지 혼자서 왔다고 한다.
이후 이자벨 위페르는 홍상수의 2017년 작품 《클레어의 카메라》에서도 주연 배우로 출연하게 된다.
그리고 2013년 개봉작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는 제인 버킨이 출연하였다.
이 사람은 잉글랜드의 가수, 배우, 각본가로 유럽 대중 문화계의 아이콘적인 존재. 물론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제인 버킨이 다른 스케줄차 방한하였을 때 홍상수에게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대화를 나누던 중에 홍상수가 "지금 촬영하는 영화가 있다"고 하니 제인 버킨이 "내가 그 영화에 출연할 수 있겠냐"고 먼저 물어봤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즉석 캐스팅.2013년에는 일본의 배우인 카세 료와도 함께 영화를 찍었다.
원래부터 카세가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그리고 우리의 생각보다 더 프랑스에서 네임 밸류가 있는 감독으로 한국 문화를 좀 안다 싶은 사람들은 홍상수 감독 이야기를 꼭 한다.
그의 작품들이 누벨 바그(그중에서도 특히 로메르) 영화와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맨스의 1주일 예지원 편에서도 가게 주인이 "예지원을 홍상수 영화에서 봤다"고 사진을 요청하거나, 예지원의 파트너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예지원이 출연했다"고 하자 놀라워할 정도.홍상수 감독은 《강원도의 힘》까지만 해도 대중성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2010년대 들어서 개봉한 5편의 영화 《밤과낮》,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의 경우는 전작들에 비해 관객들이 보기에 굉장히 편한 영화가 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평가받는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들이 모두 수익을 내는 데 실패하자, 나름대로 영화를 계속 찍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예를 들어 감독 본인 포함 5명을 넘지 않을 정도로 스태프를 줄이고, 카메라도 좋아하는 필름을 버리고 디지털 카메라를 쓰기 시작했다.
때문에 홍상수는 인디영화 감독이면서도 블루레이 발매율이 높은 감독이기도 하다.
디지털로 찍으니 오소링 과정도 간편하고, 블루레이 제작도 전원사 쪽에서 관여하기에, 싸게 내놓기 편해서인 듯. 물론 본인 성격상 코멘터리 같은 부록은 거의 없고 조촐하게 영화만 내놓지만... 사실 전원사 이전에도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HD 텔레시네도 거친 적 있고 기존 엉성한 DVD가 HD 리마스터링되어 재발매될 정도로 유달리 광매체 친화적인 감독이기도 했다.
거기에 예술적 명성을 미리 얻은 덕에 배우들도 노 개런티로 출연해준다.
그리하여 최근의 영화에서는 흑자전환(!!!)을 이룩했다.
해외 영화제 상복도 여전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과 각본상, 심사위원대상을 각각 수상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2년 이상 연속 수상을 한 첫번째 한국영화인이다.
재미있는 건 처음에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렇게 스태프와 제작비를 줄이기 시작했지만, 이게 오히려 예술적으로도 이익이 되었다는 점이다.
스태프가 적고 투자비도 소액이다 보니, 외부 간섭 없이 감독이 맘 편하게 자신의 의도대로 영화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자잘한 의견 교환, 조율도 블록버스터에 비해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된다고 한다.
홍상수 감독은 앞으로 자신이 더욱 상업적으로 실패할 경우에는 혼자서 100만 원 가지고라도 영화를 만들 의향이 있다고 한다.
실험영화 감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소통을 유지하는 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영화를 찍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들에게는 그의 영화가 '맨날 똑같다'라고 느껴질 수 있다.
보통 이미지냐, 스토리냐를 가르는 것이 일반 대중들의 영화 감상 방식이고 이곳에서도 그런 식으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홍상수는 애초부터 '구조'에 집착해왔고 데뷔 이후 내내 그것을 통한 실험에 집중했다.
한 마디로 우리의 기억들이 나열되는 방식은 일종의 편견일 뿐이고, 그 나열을 이리저리 뒤바꾸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가? 가 홍상수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스스로도 잘 말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그의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이게 그의 유년기에 얼마나 강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홍 감독은 1960년대 영화 제작자 부부인 홍의선(父), 전옥숙(母)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 홍의선은 육군 중령 출신 영화 제작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제작 스튜디오를 설립한 사람이다.
전옥숙은 영화, 방송 제작자로 후지TV의 서울지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대쪽 같은 성미와 호탕함, 리더십으로 따르는 사람도 많았던 듯.1968년 경향신문에 실렸던 사진흥미로운 것은 부부가 각자 정치적 성향이 굉장히 달랐다.
홍의선은 아무래도 군 장교 출신이니 보수 우익 성향이었지만, 전옥숙은 교수 리영희가 누님이라고 깍듯이 존경했고, 특히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할 정도로 진보적 인사로 유명했다.
그러나 호탕한 성격으로 우익 인사들에게도 우호적이었기에 2015년 7월 9일에 전옥숙이 85세로 세상을 떠날 당시 뉴데일리가 꽤 긍정적인 기사를 내며 명복을 빈다는 글을 썼다.
어쨌거나 전옥숙이 시인 김지하의 뺨을 칠 정도로 괄괄한 성격에, 밤에 술 마시다가 YS를 부르면 YS가 금방 나타났다고 할 정도로 워낙 당대의 정치-문화 계통으로 마당발이라, 굉장히 요란한 집안 환경에서 자랐다.
전옥숙이 매년 연말에 주최하는 송년회는 대한민국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함께하는 자리로 유명했으며, 그녀의 사망 전인 2010년대까지도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부부가 해방-한국전쟁 후 겨우 다시 싹트던 근현대 문화의 핵심 인물들이었으니 잘 사는 집안도 집안이지만 집안이 갖는 문화-예술적인 권력과 특권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오! 수정》 당시 부잣집 도련님들의 심리와 행태에 관한 살아있는 디테일은 멀리서 온 게 아닌 듯 싶다.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지만 어릴 때 방황했으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음주와 비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편해지긴 하지만 확실히 이 시절의 경험이 그를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듯. 부모의 이혼 후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자신을 반평생 괴롭혔다고 술회하고 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밤낮없이 술독에 빠져 살았으며, 어디에도 잘 속하지 못하고 도덕적-문화적 결벽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책도 읽어보고 나름대로 사회가 권하는 방안(지금으로 치면 처세술이나 자기계발 같은 내용)을 열심히 시도해보았지만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자신은 자신대로 고통스러웠다.
그때서야 자신의 타고난 기질을 인정하면서 모든 통념과 틀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자기만의 직관적인 눈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만 거의 몇 년이 걸렸다고. 그의 가치관 중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어쨌든 그래서 대학도 갈 생각없이 빈둥거리던 중, 작곡이나 해볼까 했는데 입시 기간을 놓쳐서 포기하고 다시 빈둥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친구인 연극연출가 오태석이 "너는 연극 연출하면 잘 어울리겠다"라는 권유를 듣고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해서 연극 연출을 배우려 했으나 강압적인 분위기와 무기력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1년 만에 자퇴한다.
이 당시의 그는 굉장히 소심하고 연약하고 감성적이었다고 술회한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혼자 학교 앞 술집에 앉아서 한없이 답답함에만 빠져있는 자신의 상태만 생각난다니 학교가 꽤나 싫었던 듯하다.
결국 그는 미국에 도피성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와 시카고 예술대학교에서 공부한다.
거의 10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는데,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모두 이 시절 확립되었을 정도로 중요하고 치열했던 시기였다고 한다.
미국 유학 시절에 영화 말고도 미술, 문학, 음악 등 전반적인 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가 사랑해 마지 않는 예술가들(세잔, 지드), 미국의 대문호들(벨로, 헤밍웨이) 등은 모두 이 시기 때 탐닉한 걸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 결혼도 했다.
25살 때인 1985년에 동갑내기 여자와 결혼을 했다.
부인이 미국 영주권자(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병역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영화에 눈을 뜨고 영화를 파기 시작한 것은 20대 후반이나 돼서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 달려가는 씨네키드도 아니였던 모양. 대학 졸업과제로는 실험영화 '개미 쳐다보는 여인'과 '사과 먹는 여인' 등을 찍었다.
말 그대로 개미보는 여자와 사과먹는 여자를 롱테이크로 찍은 실험영화였다.
원래 사과 먹는 여인은 고기 먹는 여인이었는데, 모델이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뒤늦게 사과로 바꿔서 찍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제출 기간에 턱걸이로 냈고, 그 외에 기간도 오로지 생각과 구상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의 기질과 즉흥성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1991년 프랑스 파리에 1년간 체류하기도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홍상수가 프랑스 예술 영화 극장 시네마테크에 다녔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홍상수 본인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 프랑스 영화가 아니라 옛날 미국 영화만 보러 다녔다고 한다.
이후 그의 아내가 파리 생활에 합류해서 애 보는 일도 함께 했다고 한다.
30줄에 들어선 나이인 1992년에 한국에 돌아온 홍상수는 어머니가 설립한 '시네텔 서울'에 들어가 PD 생활을 하였다.
SBS에서 방영했던 다큐 《작가와 화제작》이 홍상수가 만든 프로그램.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발표하며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구효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특이한 서사를 보여주는 편집기법으로 발표되자마자 비평계에 충격을 주며,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홍상수는 일약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특히 정성일의 경우는 엄청난 극찬을 했는데, "1996년이 나와 한국영화계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은 홍상수, 김기덕, 임순례의 데뷔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평론을 썼다.
당시 그들의 영화는 상업적 히트작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그 해보다 시간이 몇 년이나 지나서도 다른 평론에 또 저 이야기를 썼다.
무려 20년이 지난 뒤에도 정성일은 홍상수 최고의 작품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서슴없이 꼽는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무려 송강호의 영화 데뷔작이다.
주인공의 대학 친구로 한 장면밖에 안 나오는 단역이었다.
이후 1998년《강원도의 힘》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분에 초청되어 프랑스 비평가들을 사로잡았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나리오 교수로 임명되어 몇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절에 졸업한 영화과 학생들의 졸업 작품이 모두 홍상수화되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이후 2004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으며, 2005년에는 《극장전》으로 칸 경쟁 부분 연속 진출에 성공했다.
(이기우 인터뷰 기사) 결국 2010년 <하하하>로 63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받게 된다.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인 황금표범상을 받았는데 이는 1989년 배용균이 감독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후 26년 만에 한국 영화로 이 상을 받은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국제영화제-아시아 쪽 영화제 빼고 서구권-에서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대상을 받아 당시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던 영화였다.
더불어 2020~2022년까지 3년 연속으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한국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3년 연속 수상한 감독이기도 하다.
지금도 꾸준히 영화 만들고 있는 중이지만 흥행 부진 탓인지 사재를 털어서 만든다거나, 상업 스폰서가 아닌 지자체에서 투자를 받아서 찍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제작비를 정말 들이지 않기로 알려졌고 흥행부진도 쫄딱 망한 수준이 아니며 프랑스 영화계의 지속적인 푸시 덕인지 홍상수의 명성이 갈수록 쌓이고 영화 연출 스타일에 반한 영화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출연함으로써 제작비 절감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노 개런티로 출연한 배우들의 목록을 보면 그야말로 위엄이 쩐다.
고현정을 시작으로 김태우, 정유미, 문성근, 이선균, 김상경, 유준상, 하정우, 정재영, 김상중, 문소리, 엄지원, 예지원, 김강우, 김규리, 윤여정, 김주혁, 권해효, 이기우 등 독립/예술영화 진영에선 찾아보기 힘든 캐스팅이다.
이 캐스팅 자체가 정말로 순수하게 홍상수 영화에 대한 헌사도 있지만, 자신의 필모에 거장의 작품을 넣고 싶어하는 배우들도 있고 또 출연 이후 잘 풀리는 배우들이 많다.
출연했던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홍상수 영화를 하고 나서 매너리즘 타파, 연기가 늘었다는걸 후에 체감한다고 한다.
또한 홍상수 감독 영화 특성상 롱테이크를 찍는 장면이 많아 대사를 외우기 힘들거라고 여겨지지만 생각보다 잘 외워져서 배우들 스스로 놀란다고 한다.
이는 감독이 배우들을 평상시에도 관찰해서 배우들 위에 비슷한 성격의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표현하기 때문인거 같다고 이동진은 평했다.
대표적으로 배우 김의성의 경우 홍상수의 데뷔작의 주인공으로 주목받아 활동했으나 세월이 지나 영화계에서 잊혀졌다가 북촌방향에서 기용된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김상중, 권해효 등 잊혀졌던 중견 배우들이 재조명을 받고 다른 영화들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홍상수 영화의 경우 촬영기간이 다른 상업영화에 비해 굉장히 짧고 스피디하기 때문에 스케줄만 맞으면 해볼 만하고 연출, 촬영 스타일이 갖는 독특함과 어려움 때문에 영화배우 입장에서 상당한 도전이 되고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어서 상당수의 배우들이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씩 다시 출연하니 홍상수 감독과 배우 모두가 윈윈하는 결과가 된다.
2012년 개봉작 《다른 나라에서》의 주연 배우인 이자벨 위페르 역시 노 개런티로 촬영했다.
한국에 올 때 수행원 1명도 없이, 가방 하나만 끌고 인천국제공항에서 촬영지까지 혼자서 왔다고 한다.
이후 이자벨 위페르는 홍상수의 2017년 작품 《클레어의 카메라》에서도 주연 배우로 출연하게 된다.
그리고 2013년 개봉작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는 제인 버킨이 출연하였다.
이 사람은 잉글랜드의 가수, 배우, 각본가로 유럽 대중 문화계의 아이콘적인 존재. 물론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제인 버킨이 다른 스케줄차 방한하였을 때 홍상수에게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대화를 나누던 중에 홍상수가 "지금 촬영하는 영화가 있다"고 하니 제인 버킨이 "내가 그 영화에 출연할 수 있겠냐"고 먼저 물어봤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즉석 캐스팅.2013년에는 일본의 배우인 카세 료와도 함께 영화를 찍었다.
원래부터 카세가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그리고 우리의 생각보다 더 프랑스에서 네임 밸류가 있는 감독으로 한국 문화를 좀 안다 싶은 사람들은 홍상수 감독 이야기를 꼭 한다.
그의 작품들이 누벨 바그(그중에서도 특히 로메르) 영화와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맨스의 1주일 예지원 편에서도 가게 주인이 "예지원을 홍상수 영화에서 봤다"고 사진을 요청하거나, 예지원의 파트너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예지원이 출연했다"고 하자 놀라워할 정도.홍상수 감독은 《강원도의 힘》까지만 해도 대중성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2010년대 들어서 개봉한 5편의 영화 《밤과낮》,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의 경우는 전작들에 비해 관객들이 보기에 굉장히 편한 영화가 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평가받는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들이 모두 수익을 내는 데 실패하자, 나름대로 영화를 계속 찍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예를 들어 감독 본인 포함 5명을 넘지 않을 정도로 스태프를 줄이고, 카메라도 좋아하는 필름을 버리고 디지털 카메라를 쓰기 시작했다.
때문에 홍상수는 인디영화 감독이면서도 블루레이 발매율이 높은 감독이기도 하다.
디지털로 찍으니 오소링 과정도 간편하고, 블루레이 제작도 전원사 쪽에서 관여하기에, 싸게 내놓기 편해서인 듯. 물론 본인 성격상 코멘터리 같은 부록은 거의 없고 조촐하게 영화만 내놓지만... 사실 전원사 이전에도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HD 텔레시네도 거친 적 있고 기존 엉성한 DVD가 HD 리마스터링되어 재발매될 정도로 유달리 광매체 친화적인 감독이기도 했다.
거기에 예술적 명성을 미리 얻은 덕에 배우들도 노 개런티로 출연해준다.
그리하여 최근의 영화에서는 흑자전환(!!!)을 이룩했다.
해외 영화제 상복도 여전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과 각본상, 심사위원대상을 각각 수상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2년 이상 연속 수상을 한 첫번째 한국영화인이다.
재미있는 건 처음에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렇게 스태프와 제작비를 줄이기 시작했지만, 이게 오히려 예술적으로도 이익이 되었다는 점이다.
스태프가 적고 투자비도 소액이다 보니, 외부 간섭 없이 감독이 맘 편하게 자신의 의도대로 영화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자잘한 의견 교환, 조율도 블록버스터에 비해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된다고 한다.
홍상수 감독은 앞으로 자신이 더욱 상업적으로 실패할 경우에는 혼자서 100만 원 가지고라도 영화를 만들 의향이 있다고 한다.
실험영화 감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소통을 유지하는 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영화를 찍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들에게는 그의 영화가 '맨날 똑같다'라고 느껴질 수 있다.
보통 이미지냐, 스토리냐를 가르는 것이 일반 대중들의 영화 감상 방식이고 이곳에서도 그런 식으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홍상수는 애초부터 '구조'에 집착해왔고 데뷔 이후 내내 그것을 통한 실험에 집중했다.
한 마디로 우리의 기억들이 나열되는 방식은 일종의 편견일 뿐이고, 그 나열을 이리저리 뒤바꾸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가? 가 홍상수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3. 페르소나
홍상수는 같은 배우와 여러 번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몇몇 배우는 홍상수의 페르소나라고 별명이 붙여지기는 했는데, 위에 말했듯이 배우들은 그 수식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듯. 정유미는 공식석상에서 홍상수의 페르소나냐? 라는 질문에 부인하기도 했다.
밑 링크는 역대 홍상수 감독과 2번 이상 작업한 배우들을 정리해 놓은 표다.
링크사실 표를 보면 알겠지만, 홍상수 사단이라 불리지만 본인 역시 이런 틀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3-4편 단위로 사단 멤버들이 교체되는 편이며, 의외의 캐스팅도 즐겨쓴다.
고현정, 정재영, 이민우 같은 경우 첫 캐스팅 당시 의외라는 평을 받았지만 평이 좋았던 캐스팅으로 꼽힌다.
비슷비슷한 시기에 촬영돼서 그런지 다른 영화에서 조역으로 나왔던 배우가 차기작에서 주역으로 올라오는 경우도 있는 편. 권해효가 대표적이다.
김민희의 경우 아예 그 후/풀잎들/강변호텔에 아름이라는 동일 캐릭터로 나올 정도이다.
홍상수의 경우 인물이 다른 작품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는데, 김민희가 이를 달성했다.
다.
그래서 몇몇 배우는 홍상수의 페르소나라고 별명이 붙여지기는 했는데, 위에 말했듯이 배우들은 그 수식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듯. 정유미는 공식석상에서 홍상수의 페르소나냐? 라는 질문에 부인하기도 했다.
밑 링크는 역대 홍상수 감독과 2번 이상 작업한 배우들을 정리해 놓은 표다.
링크사실 표를 보면 알겠지만, 홍상수 사단이라 불리지만 본인 역시 이런 틀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3-4편 단위로 사단 멤버들이 교체되는 편이며, 의외의 캐스팅도 즐겨쓴다.
고현정, 정재영, 이민우 같은 경우 첫 캐스팅 당시 의외라는 평을 받았지만 평이 좋았던 캐스팅으로 꼽힌다.
비슷비슷한 시기에 촬영돼서 그런지 다른 영화에서 조역으로 나왔던 배우가 차기작에서 주역으로 올라오는 경우도 있는 편. 권해효가 대표적이다.
김민희의 경우 아예 그 후/풀잎들/강변호텔에 아름이라는 동일 캐릭터로 나올 정도이다.
홍상수의 경우 인물이 다른 작품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는데, 김민희가 이를 달성했다.
다.
4. 필모그래피
홍상수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5. 수상 경력
연도
|
시상식/영화제
|
수상 부문
|
작품
|
2022
|
제7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
은곰상 심사위원대상
|
소설가의 영화
|
2021
|
제7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
은곰상 각본상
|
인트로덕션
|
2020
|
제7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
은곰상 감독상
|
도망친 여자
|
2019
|
제20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대상
|
강변호텔
|
2018
|
제5회 들꽃영화상
|
극영화 감독상
|
그 후
|
2017
|
제18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대상
|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
|
2016
|
제64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
은조개상
|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
2015
|
제16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대상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제68회 로카르노 영화제
|
황금표범상
|
||
제2회 들꽃영화상
|
극영화 감독상
|
자유의 언덕
|
|
2014
|
제36회 낭트 3대륙 영화제
|
골든 몽골피에 최우수작품상
|
|
제3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최우수작품상
|
||
제23회 부일영화상
|
최우수감독상
|
우리 선희
|
|
2013
|
제1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심사위원특별상
|
|
제66회 로카르노 영화제
|
국제경쟁-감독상
|
||
2012
|
제21회 부일영화상
|
유현목영화예술상
|
|
2011
|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
대통령표창
|
|
제40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
리턴 오브 타이거상
|
옥희의 영화
|
|
2010
|
제19회 부일영화상
|
최우수감독상
|
하하하
|
제63회 칸 영화제
|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 대상
|
||
2008
|
제2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최우수작품상
|
밤과 낮
|
각본상
|
|||
제17회 부일영화상
|
최우수작품상
|
||
제9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최우수작품상
|
||
2007
|
제22회 마르 델 플라타 영화제
|
감독상
|
해변의 여인
|
2006
|
제9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
올해의감독상
|
|
2003
|
제29회 시애틀국제영화제
|
거장감독쇼케이스상
|
|
2002
|
제47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
감독상
|
생활의 발견
|
2000
|
제45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
각본상
|
오! 수정
|
제1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최우수작품상
|
||
각본상
|
|||
제13회 도쿄국제영화제
|
심사위원특별상
|
||
특별언급상
|
|||
1998
|
제19회 청룡영화상
|
감독상
|
강원도의 힘
|
각본상
|
|||
1997
|
제42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
최고신인상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제20회 황금촬영상
|
신인감독상
|
||
제26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
타이거 상
|
||
1996
|
제1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감독상
|
|
제17회 청룡영화상
|
신인감독상
|
||
제15회 밴쿠버국제영화제
|
용호상
|
6. 카예 뒤 시네마 평가
- 2005 극장전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8위
- 2012 다른 나라에서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5위
- 2013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8위
- 2014 우리 선희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10위
- 2017 그 후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5위
- 2018 밤의 해변에서 혼자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7위
- 2020 도망친 여자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2위
- 2020 강변호텔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6위
- 2022 인트로덕션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8위
7. 김민희와의 관계
2016년 6월 21일, 배우 김민희와의 스캔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2017년 3월 13일, 홍상수는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기자간담회에서 김민희와의 연애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들리는 말에 따르면, 홍상수는 김민희와의 연애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이후에 영화 작품보다도 두 사람의 사생활에 더 포커스를 맞춘 언론에게 시달리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홍상수, 연인 김민희와 관계 밝힌 것 크게 후회 중 리얼스토리 눈에서는 홍상수가 영화·애니메이션학과의 영화 연출 전공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건국대학교까지 찾아가기도 했고 이 때 홍상수는 <리얼스토리 눈> 제작진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에 따라 홍상수는 "더 이상 국내 공식석상에는 모습을 드러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도 홍상수는 국내 취재진을 멀리하고 해외 취재진하고만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017년 7월 6일에 개봉일이 정해진 《그 후》라는 영화의 언론시사회에서도 의례적으로 있는 기자간담회도 하지 않고 아예 참석 자체를 하지 않았다.
2016년 6월 21일, 기사에서 배우 김민희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호흡을 맞추고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두 사람의 간통은 영화계에 암암리에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여러 영화계 종사자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영화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기사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홍상수 김민희 불륜설 비하인드 (뉴스엔 윤가이 기자) 영화 《아가씨》가 칸 영화제로 진출할 때까지, 해당 영화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암암리에 아는 기자들에게 "영화에 흠이 되지 않게끔,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실제로 실명을 언급하지 않은 기사가 6월 1일자로 보도된 바 있다.
2016년 7월 20일에 방영된 리얼스토리 눈에서, 홍상수 감독의 부인은 자신은 인터뷰를 한 적이 없으며 일부 기사는 기자들의 악의적인 보도로 심하게 과장되었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6월 21일 단독보도라면서 나온 김민희의 막장 드라마스러운 발언과 기타 여러가지 자극적인 관련 보도는 정작 당사자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한마디로 카더라 통신에 불과 한 것.홍상수는 결별설이 보도될 당시 귀국 후 직접 해명하겠다고 했으나, 그 이후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으며 11월 중순 경 이혼 신청을 넣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김민희의 경우 이 사태의 여파로 활동 자체를 하지 않고 있으며 청룡영화상 시상식도 불참했다.
2017년 3월 13일, 홍상수와 김민희는 공개적으로 기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간통을 인정했다.
2017년 2월 17일,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작품으로 베를린 영화제에 김민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2022년 2월 16일 (현지시간) 오후 독일 베를린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는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소설가의 영화'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홍상수와 배우이자 제작실장을 맡은 김민희가 참석했다.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가 2년 만에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022년 11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홍상수와 김민희의 목격담이 올라왔다.
홍상수가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교에서 김민희의 팬이 호들갑을 떨자 홍상수가 째려봤으며, 운전은 김민희가 하고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
2017년 3월 13일, 홍상수는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기자간담회에서 김민희와의 연애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들리는 말에 따르면, 홍상수는 김민희와의 연애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이후에 영화 작품보다도 두 사람의 사생활에 더 포커스를 맞춘 언론에게 시달리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홍상수, 연인 김민희와 관계 밝힌 것 크게 후회 중 리얼스토리 눈에서는 홍상수가 영화·애니메이션학과의 영화 연출 전공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건국대학교까지 찾아가기도 했고 이 때 홍상수는 <리얼스토리 눈> 제작진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에 따라 홍상수는 "더 이상 국내 공식석상에는 모습을 드러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도 홍상수는 국내 취재진을 멀리하고 해외 취재진하고만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017년 7월 6일에 개봉일이 정해진 《그 후》라는 영화의 언론시사회에서도 의례적으로 있는 기자간담회도 하지 않고 아예 참석 자체를 하지 않았다.
2016년 6월 21일, 기사에서 배우 김민희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호흡을 맞추고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두 사람의 간통은 영화계에 암암리에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여러 영화계 종사자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영화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기사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홍상수 김민희 불륜설 비하인드 (뉴스엔 윤가이 기자) 영화 《아가씨》가 칸 영화제로 진출할 때까지, 해당 영화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암암리에 아는 기자들에게 "영화에 흠이 되지 않게끔,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실제로 실명을 언급하지 않은 기사가 6월 1일자로 보도된 바 있다.
2016년 7월 20일에 방영된 리얼스토리 눈에서, 홍상수 감독의 부인은 자신은 인터뷰를 한 적이 없으며 일부 기사는 기자들의 악의적인 보도로 심하게 과장되었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6월 21일 단독보도라면서 나온 김민희의 막장 드라마스러운 발언과 기타 여러가지 자극적인 관련 보도는 정작 당사자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한마디로 카더라 통신에 불과 한 것.홍상수는 결별설이 보도될 당시 귀국 후 직접 해명하겠다고 했으나, 그 이후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으며 11월 중순 경 이혼 신청을 넣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김민희의 경우 이 사태의 여파로 활동 자체를 하지 않고 있으며 청룡영화상 시상식도 불참했다.
2017년 3월 13일, 홍상수와 김민희는 공개적으로 기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간통을 인정했다.
2017년 2월 17일,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작품으로 베를린 영화제에 김민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2022년 2월 16일 (현지시간) 오후 독일 베를린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는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소설가의 영화'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홍상수와 배우이자 제작실장을 맡은 김민희가 참석했다.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가 2년 만에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022년 11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홍상수와 김민희의 목격담이 올라왔다.
홍상수가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교에서 김민희의 팬이 호들갑을 떨자 홍상수가 째려봤으며, 운전은 김민희가 하고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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