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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의 주요 소식 및 상세 정보 소개 (빈센조,사망,배우,오기호)

by 채은아빠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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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나철
羅喆
초명
나두영(羅斗永)
본명
나인영(羅寅永)
문향(文鄕)
경전(耕田) → 홍암(弘巖)
본관
나주 나씨
출생
1863년 12월 2일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
(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사망
1916년 음력 8월 15일 (향년 52세)
황해도 안악군 구월산 삼성사
묘소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룽청진 칭후촌 삼종사 묘역
종교
대종교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종교의 초대 교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3년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마을(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나용집(羅龍集)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1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한 후 승문원, 승정원 등 관청에서 문신으로 근무하였다.
나철이 썼던 한시가 김윤식의 눈에 들어 그의 식객으로 있었다고 하며, 나철은 이때 김윤식과 교분을 쌓아 스승으로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벌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인 1907년부터 자신회를 결성한 그는 오기호 등과 함께 오적 암살단을 조직,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하였다.
하지만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 등과 함께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고종의 특사를 받아 그 해 풀려난 그는 1908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방법으로 구국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아무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동지들과 함께 한성부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훗날 대종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입산수도하다가 1916년 구월산에서 자결하였다.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한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대종교 측 주장에 따르면 나철은 폐기법(閉氣法)으로 조천(朝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숨을 멈춰서 죽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호흡은 대표적인 불수의 작용이고, 자기 스스로 호흡을 멈추면 당연히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곧이 믿기는 어렵다.
종교학자들은 나철이 폐기법으로 조천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지만 사학자(史學者)들은 폐기법의 진위 여부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으며 그때 그가 자결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철의 묘는 중국 지린성 허룽시(和龙市)에 있다.
나철과 함께 대종교의 교세 확장에 힘쓴 서일, 김교헌의 묘도 함께 있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정보다.

 

3. 기타

 

  • 나철은 호남에서 7대조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렇지만,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인물들의 자금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대종교가 교단을 확장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 장남 나정련, 차남 나정문도 대종교 포교 활동에 적극 가담했고, 독립운동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두 형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영화 사바하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동방교 교주 풍사 김제석의 신문 사진에 나철 영정을 무단 도용해 논란을 일으켰다. 제작사 측은 곧바로 명백한 실수를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 이정재가 사이비 종교를 취재하면서 "교리 쪽은 좀 어때? 동학 쪽이야? 단군?"이라며 묻는 대사가 나오고, 대종교 경전 중 하나인 <<천부경>>의 81수에 맞춰 암호를 푸는 장면 등을 볼 때 단순 실수로 보기에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나철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보성군 측에서도 항의 성명을 발표하였고, 4월 4일 홍암나철기념사업회 회장과 회원 30여 명이 영화사에 항의 방문하였다. 제작사 측에서 잘못된 사진 교체를 완료하고서 4월 9일 보성 홍암나철기념관 사당에 참배하고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 나철에 관한 특집은 여수MBC, 「잊혀진 민족의 지도자 홍암 나철」 (2000.4.7),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4회 특집)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 (2004.2.29), 광주MBC, 「(창사 52주년 특집) 홍암 나철, 백년의 유산」 (2016.10.27) 총 3회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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