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이름 : 뤼트 휠릿Ruud Gullit
본명 : 뤼디 딜 휠릿Rudi Dil Gullit
출생 : 1962년 9월 1일 (59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
국적 : 네덜란드 | 수리남
신체 : 키 191cm / 체중 99kg
직업 : 축구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축구감독
소속 : 선수 : ASV 메이르보이스 (1967~1975 / 유스)AFC DWS (1975~1978 / 유스)HFC 하를럼 II (1978~1979)HFC 하를럼 (1979~1982)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2~1985)PSV 에인트호번 (1985~1987)AC 밀란 (1987~1994)→ UC 삼프도리아 (1993~1994 / 임대)UC 삼프도리아 (1994~1995)첼시 FC (1995~1998), 감독 : 첼시 FC (1996~1998 / 선수 겸 감독)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8~1999)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4~2005)로스앤젤레스 갤럭시 (2007~2008)FC 테렉 그로즈니 (2011)네덜란드 대표팀 (2017~2018 / 수석 코치)
국가대표 : 66경기 17골 (네덜란드 / 1981~1994)
2. 개요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이다.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다.
네덜란드의 첫 메이저 대회 우승과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끈 1980년대~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로 꼽히며, 특히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수리남 출신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소속된 클럽마다 우승을 한다는 이유로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3. 클럽 경력
굴리트는 하를럼 소속으로 16세의 나이로 데뷔하여 에레디비시 최연소 데뷔 기록을 다시 썼으며 팀은 강등당했으나 굴리트의 활약으로 다시 승격한다.
1981-82 시즌에는 하를럼을 리그 4위로 올리며 UEFA컵 티켓을 따낸다.
이는 하를럼 역사상 유일한 유럽 대항전 출전이다.
이때의 활약으로 굴리트는 '네덜란드의 던컨 에드워즈'라는 별명을 얻는다.
세 시즌 동안 91경기 31골을 넣은 굴리트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로 이적하여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뛰면서 1982-83 시즌에 리그 우승과 KNVB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인종차별 발언을 듣기도 해서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해 리그 2연패를 이끌고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상도 받았다.
이후 AC 밀란으로 이적하여 1987-88 시즌 디에고 마라도나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1987년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특히 판바스턴과 투톱을 이뤄 맹활약하며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다.
1988-89 시즌에는 오렌지 삼총사를 결성하여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를 토대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판바스턴과 굴리트가 2골씩 득점하며,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었다.
1989-90 시즌에도 SL 벤피카를 격파하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지만, 굴리트는 88년부터 발생한 무릎 부상이 반월판 부상으로 커지며 시즌을 거의 벤치에서 보내야 했다.
마라도나의 라이벌이었고 87-88시즌엔 그에게서 리그 우승컵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라이벌리를 이어가지 못했고 월드컵에서도 부진했던 탓에 마라도나의 라이벌 자리는 그와 2차례 월드컵에서 맞대결해 1승 1패를 기록하고 자서전에서 직접 인정했던 로타어 마테우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다음시즌인 1990-91 시즌부터 적용된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정으로 인해 사키이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수비전술에 변수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또 유러피언컵 4강에서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만나 밀란이 패배한다.
여기서 밀란은 조명이 망가져 재경기를 해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그냥 경기장을 떠나버렸고 이에 UEFA는 1년간 유러피언컵 출전 금지를 내린다.
사키는 이를 마지막으로 밀란을 떠난다.
하지만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부임해 그의 밀란을 잘 계승해내며 다시 전성기를 이끌어낸다.
카펠로 감독 체제에서 1991-92 시즌에 리그 무패 우승과 그 다음 시즌도 우승을 경험하며 리그 2연패. 또 1992-93 시즌에는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하는 등 발군의 활약을 펼친 후 1993년에 밀란을 떠나 UC 삼프도리아에서 뛰었는데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의 밑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잠시 밀란에 복귀했으나 큰 활약은 하지 못했고, 첼시에서 선수 겸 감독을 하며 FA컵 우승을 차지한 후 은퇴했다.
4. 국가대표 경력
굴리트의 국대 경력을 설명하자면 먼저 네덜란드의 축구가 어떤 위기를 겪고 있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분명히 네덜란드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 아래 천재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들이 들고 나온 토탈 풋볼은 축구의 혁명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나름 영광을 이어 갔지만, 리누스 미헬스가 떠나는 등 영광의 멤버들이 노쇠하고 흩어지면서 침체가 시작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오렌지 삼총사 등장 이전까지 1970년대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리누스 미헬스가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대로 팀을 짜게된다.
당시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유럽을 제패하고 있던 AC 밀란의 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 그리고 삼총사 더해서 달타냥이라는 로날드 쿠만까지. 그리고 이 선수들을 조화롭게 묶어줄 수 있는 선수가 최상의 피지컬과 최고의 전술 이해도를 겸비한 굴리트였다.
굴리트는 가장 전술 이해도가 좋은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역사상 이보다 범용성이 좋은 축구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골키퍼와 센터백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A급 이상으로 뛰는 선수였다.
말 그대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핵심은 굴리트로 시작해서 굴리트로 끝났다.
1988년 네덜란드의 유로 우승은 바로 1974년 크루이프의 역할을 그대로 이식받은 굴리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
정확히 네덜란드가 예전의 포스를 되찾은 시작점이 유로 1988이었고, 그 뒤를 이은 대회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물론 굴리트의 플레이는 나무랄데가 없었지만, 이때 네덜란드가 16강에서 마주친 상대는 그 대회 우승팀,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끄는 서독이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16강전에서 레이카르트와 루디 푈러가 충돌했고 이 와중에 레이카르트가 루디 푈러에 침을 뱉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푈러와 레이카르트 모두 퇴장당했으나, 푈러가 없는 독일과 레이카르트가 없는 네덜란드의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적어도 푈러보다 레이카르트가 훨씬 뛰어난 선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석연치 않게 16강에서 월드컵을 접어야 했었다.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 1992에서 네덜란드는 조별예선에서 독일을 3:1로 뭉개버리면서 그대로 복수한다.
바로 레이카르트 본인이 득점을 하면서, 또한 굴리트는 이 대회에서 종횡무진 중원을 탈탈 털어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4강전 상대는 브리안 라우드루프와 페테르 슈마이켈이 버티던 덴마크였다.
네덜란드는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보따리를 싸야 했었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불참하였고 이 대회는 네덜란드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 시절이 네덜란드의 드림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1994년의 네덜란드는 더더욱 역대급의 전력으로 구축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미헬스 이후 취임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에서 굴리트와 아드보카트의 불화, 판바스턴의 부상이 겹쳐 온전한 전력으로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8강에서 맞이한 브라질에 고배를 마시면서, 탈락했고 굴리트는 1994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5. 플레이 스타일
최고의 피지컬과 기술적 완성도를 겸비했는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191cm의 장신에 88kg의 커다란 몸집을 이용한 강력한 몸싸움과 상대 센터백들의 머리가 골반 위치에 올 정도로 폭발적인 점프력과 머리로 때렸음에도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미친 목 근육을 사용한 헤더 능력,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를 가졌다.
거기에 월드 클래스급의 공격형 미드필더다운 패싱력에 강력한 발목 힘을 활용하는 슈팅 능력, 축구에 대한 전술 이해도가 매우 뛰어나 모든 포지션을 일류 레벨로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뛰었다고 평가를 받은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 상기한 전술 이해도와 최적화된 피지컬에 화려한 발재간까지 갖추어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꼽힌 선수 중의 한 명이다.
특히, 굴리트의 현역 시절에 가장 두드러졌던 전술 이해도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피지컬로 굴리트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수준급 기량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냐고 하면, 대표팀 경기를 해야 할 때 마르코 판바스턴이 부상 등으로 결장하게 되면 굴리트가 그 자리를 대신할 정도였다.
판 바스턴의 문서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그는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는 최고의 공격수였다.
그런 공격수의 빈자리를 트레콰르티스타가 채웠다는 말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윙어에서도 선출될 가능성을 보였으며, 한 칸 아래의 중앙 미드필더로서 출전했을 때 그가 보여준 경기력과 중원 장악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현 시대 미드필더로 비교하자면 야야 투레를 사례로 드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렇게 굴리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축구적 능력을 갖춘 몇 안되는 선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그가 감독이 된다면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명제에는 굴리트조차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던지 아래에 서술될 감독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단 한 번의 성공 이후 실패만 거듭했다.
6. 지도자 경력
첼시에서 몸담고 있던 1995-96 시즌, 글렌 호들 감독이 잉글랜드 국대 감독으로 부임하자 당시 첼시의 선수였던 굴리트는 선수생활을 유지함과 동시에 첼시의 지휘봉을 잡았다.
1996-97 시즌 그의 지휘력과 경기력은 첼시의 27년 만의 FA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97-98 시즌 도중 1998년 2월 12일 리그 2위와 위너스컵-리그컵 8강에 올라와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주 켄 베이츠와의 불화 끝에 경질당했다.
너무 많은 자금을 사용해 팀을 재정난에 빠뜨렸다는 이유. 여담으로 제이미 캐러거가 1997년 10월 5일에 자신의 커리어 첫 첼시전을 가졌는데 이때 첼시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하자 감독 겸 선수였던 굴리트가 워밍업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자켓만 벗고 경기에 들어와서 뛰었다.
캐러거는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고 있었는데 굴리트가 정말 굉장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1998-99 시즌을 앞두고 때마침 케니 달글리시 감독을 경질하고 새 사령탑을 물색중이던 뉴캐슬에서 모셔갔지만, 부진한 성적에 선수단 장악에도 실패하며 급격히 입지를 잃어버렸다.
특히 오랫동안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한 팀의 주장 롭 리의 등번호 7번을 빼앗고 유스 팀으로 강등시켜 팬들의 많은 원성을 샀다.
첫 시즌 리그 13위를 기록한 굴리트는 급기야 1999-2000 시즌 5라운드 승격팀이었던 선덜랜드와의 위어타인 더비에서 팀의 주포 앨런 시어러를 벤치에 앉히고 기용하지 않는 무리수를 두었고, 팀은 2-1로 패배했다.
사흘 후 굴리트는 경질되고 만다.
이후 바비 롭슨 감독이 위기에 빠진 뉴캐슬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첫 경기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8-0으로 짓밟고 시어러는 5골을 폭발시켜 굴리트를 머쓱하게 했다.
시어러가 그의 다큐멘터리에 말하길 그때 굴리트가 팀 기강을 잡기 위해 시어러를 이용했고 그때 시어러가 못했다면 시어러가 이적했을것이라고 회상했다.
200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감독이 되지만 리그 4위에 그쳐 경질되고 만다.
여담으로 이 당시 송종국을 기용하지 않았다.
피파온라인으로 재평가받기 전까지 한국 내에서는 평가가 좋지 못한 편이었다.
예스맨이라고 기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예스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굴리트와 송종국의 관계를 보면 굴리트는 처음에는 송종국을 주전으로 기용하긴 했지만 자주 송종국의 팀 융합, 전술능력 등을 탐탁지 않아 했으며 월드컵 때의 기량이 나오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까지는 기대하고 있다, 네덜란드어 학원에도 다니고 있다며 의사소통 실력이 늘어나길 기대했지만 끝내는 2년이 지났는데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언어문제에 대해 해결해야 한다며 구단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말하고 벤치에 앉혔다.
송종국 본인도 굴리트와의 축구는 자기와는 잘 맞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감독을 따라가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굴리트 입장에서 보면 공격수도 아닌 수비수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말만 하면 네, 네 하면서 전술을 계속 틀리니 참다가도 답답했을 것이다.
2006년 데이비드 베컴과 (국내에선) 홍명보의 소속팀으로 유명했던 LA 갤럭시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역시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08년, 알렉스 랄라스 단장과 함께 짤렸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라이벌 디에고 마라도나와 매우 유사하다.
같은 오렌지 삼총사였던 마르코 판바스턴과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무난하게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는 감독 활동을 접었으며 FIFA가 주최하는 공식 행사를 뛰며 사회를 자주 보는 중이다, 이 외에도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면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며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손흥민이 푸스카스상을 수상할 때 사회자가 루드 굴리트였다.
국내예능인 뭉쳐야 찬다 2에 특별게스트로 출연하였다.
7. 대회 기록
- HFC 하를럼 (1979~1982)에이르스터 디비시: 1980-81
- 에이르스터 디비시: 1980-81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2~1985)에레디비시: 1983-84KNVB 베이커: 1983-84
- 에레디비시: 1983-84
- KNVB 베이커: 1983-84
- PSV 에인트호번 (1985~1987)에레디비시: 1985-86, 1986-87
- 에레디비시: 1985-86, 1986-87
- AC 밀란 (1987~1994)세리에 A: 1987-88, 1991-92, 1992-93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88-89, 1992-93 UEFA 챔피언스 리그: 1988-89, 1989-90UEFA 슈퍼컵: 1989, 1990인터컨티넨탈컵: 1989, 1990
- 세리에 A: 1987-88, 1991-92, 1992-93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88-89, 1992-93
- UEFA 챔피언스 리그: 1988-89, 1989-90
- UEFA 슈퍼컵: 1989, 1990
- 인터컨티넨탈컵: 1989, 1990
- UC 삼프도리아 (1993~1994, 1994~1995)코파 이탈리아: 1993-94
- 코파 이탈리아: 1993-94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1988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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