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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요
6·25 전쟁(六二五戰爭) 또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1129일)간 교전이 이어졌으며, 현재까지 72년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역이용해, 극동아시아의 미소 냉전 사이에서 승기를 잡으려 한 의도가 있어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한다.
6·25 전쟁은 김일성의 강한 주도로 발발한 전쟁이며,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미국의 강력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어 직접 충돌을 꺼렸다.
그래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으나 국제정세에 문외한인 김일성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아 내고 전쟁을 일으켰다.
김일성이 없었더라면 발발하지 않았을 전쟁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6·25전쟁의 평화 협정(Peace treaty, 종전 협정 또는 강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아직도 진행 중인 전쟁이지만 현재 남북 양측의 국민들에게는 전쟁 중이라는 인식은 드물다.
이는 법적으로는 평시(平時)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시(戰時)에 시행되는 비상 법령을 계속 발동하기에는 유례 없이 긴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라, 준전시(準戰時)라는 특수한 대치 상태로 구분된다.
대법원의 판례는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 명확하게 입장을 내린 적이 없으며 사안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국회 또한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과 남북 관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남북의 지도자가 전쟁 상대인 적대 세력 원수를 만나고 스포츠 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등의 일도 이러한 특수한 상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비록 휴전 중이라고 하나 6·25 전쟁은 아직까지 종전되지 않았고, 전쟁이 지속 중인 상태이다.
참고로 2022년 6월 25일은 6·25 전쟁 발발 72주년이며, 휴전 이래로도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틀:대한민국의 대외 전쟁ㆍ전투 참조)이 있고 징병제가 유지되는 등 아직 전쟁이 유효함을 어느정도 실감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이후 당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사이의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며,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남한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중에는 그나마 가장 최근에 벌어진 전쟁이기도 하다.
6·25 전쟁에서 각각 통일에 실패한 대한민국과 북한은 이후 한반도의 정통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걸고 체제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이는 국가 운영과 국민 여론 및 국민의식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이 전쟁으로 굳어진 각 체제(體制, Regime)는 유지되고 있다.
한편 일본은 이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 제2차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대만은 중국이 병력을 한반도로 투입하는 바람에 살아나게 된다.
반면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정되어 20년 넘게 외교적 고립을 면하지 못하는 등 현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6·25 전쟁의 원인으로는 외적 기원(김일성 또는 스탈린의 기획, 제2차 세계 대전 후유증인 냉전, 일제 강점기 악영향 등)과 내적 기원(내전의 확대, 남북한 모두에 부정부패, 갑질이 만연하는 등), 더한 복합적 요인으로는 보는 경향이 크다.
또한 제1세계 vs 제2세계로 대립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 최대의 국제전쟁이다.
3. 명칭
일반적으로 전쟁은 분쟁의 주체,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그 명칭으로 쓴다.
반면 이 전쟁은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발발한 날짜가 전쟁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관습적으로 날짜-사건을 조합해 6·25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방송공사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정전협정 체결일인 7.27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이라고 포장하여 매년 열병식등의 행사를 주최하여 기념하고있다.
당시 북한에서는 남측을 미국의 괴뢰정권, 미국의 하수인들이 지배하는 악의소굴, 미군정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침략당한 영토라는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에 남쪽에 잔존하는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조국의 남반부를 해방시키자는 의미에서 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다닌다.
영어로는 The Korean War라고 부른다.
The Forgotten War라고도 한다.
Korean War라는 이름은 제1세계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UN군 사령부에서 붙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한국전쟁'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명칭 외에도 6·25전쟁을 호칭하는 몇몇 어휘들이 있는데, 가령 북한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표현은 보통 '만력조선지역'이지만,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战争)이라고도 한다.
이는 왜적에 대항해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6·25를 의미하는 항미원조와 대상만 다르다.
중국 측이 6·25전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전쟁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고자 할 때에는 조선전쟁(朝鲜战争)이라 칭한다.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戦争, 초센센소), 조선동란(朝鮮動乱, 초센도란) 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한국(韓國)을 한반도 남반부의 국가(대한민국)에 한정된 의미로 보고 아직도 조선(朝鮮)을 '한반도' 혹은 '한민족'을 일컫는 말로 쓰기 때문에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를 쓴다.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한전(韓戰)이라고 부른다.
대만에서는 베트남 전쟁도 월전(越戰)으로 부르고 있다.
다만 대만에서도 지명으로서는 조선(朝鮮)이 더 익숙하기에 민간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52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정부 간행물 "6·25사변 피살자 명부"와 1952년 국방부에서 간행된 정부 간행물 "한국전란지"로 표현되기도 했다.
행정 관서에서는 주로 '6·25'로 표기했다.
197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도 6·25사변일(六二五事變日)이 등장하고, 2014년 3월 24일에는 6·25 전쟁일로 개정되었다.
반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한국전쟁이 등재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전쟁이 발발한 날짜를 근거로 6·25 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6·25사변 또는 6·25 동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6·25전쟁이란 말은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로 한국인(남한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나 국제적으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한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Korean War라는 명칭은 객관성 중립성을 보여준다고는 하나, 그 번역어인 '한국전쟁'은 엄밀하게 말해 중립적이지는 않다.
전쟁의 한쪽 주체인 북한에서 스스로를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 학계에서는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대체로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으로 쓰인다.
2011년 한국전쟁학회에서 김명섭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전쟁 발발 책임이 모호해지거나 전도될 우려가 있다면서 6·25 전쟁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6·25가 당시 미소 냉전 체제하에서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점을 감안하면 이 전쟁의 영문 표기는 '1950~53 한국 6·25 전쟁(the 6·25 War in Korea 1950-53)' 혹은 '1950~53 한국 공산주의자 전쟁(the Communist War in Korea 1950-53)'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The Korean War를 한국전쟁으로 번역하는 것은 '조선'과 '한국'이 가지는 역사적, 개념적 차이를 간과한 것으로 기계적인 번역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조선일보 전병근 기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1980년대 미국의 수정주의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1, 1981년 출간·국내에는 1986년 번역·출간)이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국내 좌파들에게 확산됐다는 기사를 썼다.
기사국방부에서 발간한 군 공식 간행물을 보면 1952년부터 2004년까지 발간된 서적은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었지만, 2004년부터 '6·25 전쟁'이 사용되기 시작해 2005년부터는 6·25 전쟁 한 가지만 사용하고 있다.
국방부 지정 공식 용어가 과거에는 한국전쟁이었으나 2004년부터 6·25 전쟁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중인 단행 자료를 검색하면 1980년 이전에 발간된 자료 중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는 자료는 제목이 6·25로 되어 있는 자료보다 2배가 더 많이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출판계나 학계에서도 '한국전쟁'이란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이 6·25 전쟁만 있는 게 아닌데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고, 6·25가 사건의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5·18 민주화운동이나 6·10 만세 운동 등도 바꿔야 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유럽에서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처럼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근거해 명칭을 부여한 예가 존재하므로 6·25 전쟁이라고 쓰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용어는 해당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즉 역사관이 반영된 것으로서 날짜 또한 그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의 의미를 가진 'conflict'라는 단어를 사용해 6·25 전쟁을 지칭했다.
6·25 전쟁이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비치면 안된다고 봤던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의원들에 의해 'war'라는 단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6·25 전쟁이 World War III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6·25 전쟁이 '전쟁이지만 전쟁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이를 축소하여 지칭한 것이었다.
당시엔 'Korean Conflict'라 불렸다.
후에 6·25전쟁이 정치인들의 손에서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겨질 때쯤, 'war'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싸웠다고 해서 남북전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져 있는 데다, 남북으로 갈라진 곳이 한국과 미국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쓰이지 않는다.
4. 전개
The attack upon Korea makes it plain beyond all doubt that communism has passed beyond the use of subversion to conquer independent nations and will now use armed invasion and war. It has defied the orders of the Security Council of the United Nations issued to preserve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I know that all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will consider carefully the consequences of this latest aggression in Korea in defiance of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A return to the rule of force in international affairs would have far-reaching effects. The United States will continue to uphold the rule of law.대한민국에 대한 이러한 공격(북한의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체제전복이라는 수단을 넘어 이제는 무장침략과 전쟁을 사용할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국제평화와 안보를 지키기 위한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또한 무시하였습니다.
(중략)저는 UN에 소속된 모든 국가들이 유엔헌장을 무시한 채 한국에 대한 침략의 결과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라 봅니다.
국제관계에서 힘에의한 통치로의 복귀는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미국은 계속해서 법치를 지킬 것입니다.
해리 S. 트루먼. 1950년 6월 27일 연설문다.
한국전쟁은 중소 양국의 흉도와 사주밑에 북괴의 기습침략으로 발발된 민족공통의 참화이며 수난이었다.
한국전쟁사1:북괴의 남침과 서전기, 국방부, 1977년, p.17다.
이 전쟁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남북한간의 민족전쟁의 성격과 소련의 세계 공산화 전략의 성격을 지닌 전쟁이었으며, 비록 전장이 한반도에 국한되었지만 남침 이후 20개국의 전투부대가 참전함으로써 양대 진영간의 국제전적인 성격을 띤 전쟁이었습니다.
6.25 전쟁사 1권, p.5 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김일성의 한반도 무력 통일 구상이다.
스탈린이 전쟁을 주도했다는 주장, 내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내의 경우 한국전쟁의 원인을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선 한국전쟁에 대해서 해주진공설을 기반으로 남한의 북침설과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남침유도설이 있으나 이러한 유도설은 오래전에 이미 논파되었다.
한국에서는 90년대에 갑자기 이런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당시 국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김일성 및 공산권의 야욕에 의한 기습남침으로만 규정되 있었다가 87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조사 중에 여러 서적들이 국내로 들어왔는데, 이 중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등에 남침유도설 등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남침유도설은 수많은 반박자료에 의해서 논파되었다.
2010년 이후 국지전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6·25 전쟁을 외적 기원(김일성 또는 스탈린의 기획)과 내적 기원(내전의 확대)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발생한 것으로 보는 복합 기원설에 국제적으로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6·25 전쟁에 대한 명확한 원인과 기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대립하고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련은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지는 않았지만 만주의 북한 비행학교에서 소련 전문가들이 조종사 양성에 참여했였으며, 북한의 기초적인 군사교육을 담당했다.
6.25 전쟁사. p.544 심지어 일부 파일럿들을 중공군으로 위장시켜 투입까지 하였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모른 척 했다.
6·25 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을 키우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당시 맥아더는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장제스와 함께 중국 해안에 상륙하자는 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 명예가 실추됐다.
한편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뿐만이 아니었다.
세간에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에 의하면, 스탈린 역시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양측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들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전쟁 억제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은 것이다.
5. 유엔군
※ 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이 저지른 학살 행위는 6.25 전쟁 학살/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 문서 참조.
6. 대한민국
6.25 전쟁 당시 호남 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 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8936명의 65%에 이른다.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연감(1953년)」 내무부 통계국.다.
지난 세기에는 독재 정권이라서 진상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이유와 반공이 국시였던 점으로 인해 북한의 사악함과 국군의 영웅적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은폐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도 전쟁 범죄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전라도는 그 역사적 특이성과 복잡함으로 인하여 좌우대립이 극심했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사실 양반들이 6.25 전쟁으로 망했다는 옛날의 믿음과 달리 전라도 양반들조차 물론 피해를 크게 입은 사람들도 있으나 오히려 자신들을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히고도 멀쩡한 사람들도 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혐오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비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기 때문에 공격자나 범죄자 혹은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대표적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있는데, 대한민국 국군 및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단체에 의해 10만~30만 명의 38선 이남 거주 대한민국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그나마 유엔군이 전쟁 범죄 행위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을 저지르는 한국군 및 경찰을 유엔군이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케이스는 있다.
영국군이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 당시 추가적인 학살을 막은 사례 등.그 외에도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 징집(자발적으로 종군한 학도병과는 별개),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있다.
다만 이런 학살들에 관련된 내용들은 아직도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있는데, 한국 정부에서 이런 사실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7. 미국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문서에 나와있듯 한반도 전역에서의 미군의 전술, 전략 폭격은 큰 민간인 사상자와 영향을 남겼다.
예를 들면 서울 일대 폭격으로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4,280명의 서울 시민이 사망했는데 이는 서울시 사망자의 24.8%다.
이는 서대문구, 중구, 용산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 폭격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서울은 용산과 종로, 중구 정도만 서울이었고 나머지는 다 경기도였기 때문에 서울 전체를 폭격한 것. 민간인에 대한 폭격 문제는 최근 미국의 기밀문서들이 비밀 유지 기한이 풀리면서 당시 폭격기나 전투기 조종사가 쓴 비행 일지가 드러나며 밝혀지고 있다.
국군, 북한군, 중국군은 물론이고, 미군 스스로가 저지른 학살까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모조리 사진과 자료로 남겼다.
그렇게 남은 미군의 대표적인 학살 사건은 제1기병사단이 했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다.
그 밖에 세균전을 행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으며 미국 측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최근 민간에서 진행된 조사로 미국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에 생각보다 더 깊이 개입했음이 밝혀지고 있으나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는 이승만 정권 범죄보다 미군 범죄 규명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기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대전형무소에서 미군이 운전하는 미군 트럭에 싣고 와 미군이 촬영하는 감독 하에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학살이 '미군 몰래' 자행된 게 아니라 '미군의 지휘 아래'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손호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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