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출생 : 1973년 4월 5일,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사망 : 2013년 1월 6일 (향년 39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신체 : 194cm, 110kg, A형
국적 : 대한민국
가족 : 아버지 조주형, 누나 조성미
자녀 : 아들 최환희딸 최준희
학력 : 용마초등학교 (전학) 둔촌초등학교 (졸업) 신일중학교 (졸업) 신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 학사)
포지션 : 투수
투타 : 우투우타
프로입단 : 199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요미우리) 2005년 신고선수 (한화)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6~2002) 한화 이글스 (2005~2007)
지도자 경력 :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1)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2)
수상 : 일본시리즈 우승(2000)
종교 : 천주교(세례명: 마리오)
2.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고교 시절 당시 뛰어난 야구 실력과 탈아시아급 피지컬과 준수한 외모로 인기를 얻었던 야구선수였으나 프로 진출 이후 부상과 자기관리 부족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2000년 12월에 인기배우 최진실과 결혼을 하였으나 4년만인 2004년 이혼했다.
이후 가정폭력을 저질렀고 언론플레이를 일삼아 결혼 파탄의 원인을 최진실에게 전가하려 했던 것이 들통나 사회적으로 추락했다.
2005년에 한화 이글스에 투수로 복귀했으나 이렇다할 성적으로 거두지는 못했고 2007년에 은퇴했다.
2008년 최진실의 자살 이후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활동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다시금 재기의 기지개를 피는 듯 했으나 2013년 1월 6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3. 고등학교 이전
초등학교 4학년때 가족이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사하며 조성민도 둔촌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 때부터 야구부 생활을 시작. 훗날 190대 중반까지 자라는 체격은 이미 이 때부터 운동부가 눈독을 들일 정도였고, 한창 때 운동선수로 활약한데다 한때 실업야구 최강을 자랑했던 한일은행 소속 은행 간부였던 아버지 조주형의 인맥 덕에 야구인들에게 일찌감치 눈에 띌 수 있었다.
게다가 누나 역시 사이클 선수로 활약하는 등 엘리트 운동선수 집안 출신. 다만 평소 학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부에도 힘을 쏟느라 신일고 진학 이전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이후 고교 진학을 앞두고 출전한 전국대회에서 타격왕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야구선수의 길을 걷는다.
4. 신일고등학교 시절
신일고 시절 조성민. 신체조건은 이미 완성단계였기에 타격에는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으나 투구에서는 신체를 활용하는 방법을 잘 몰라 2학년때까지만 해도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프시즌 우연한 기회에 장명부, 신용균 등 우수한 인스트럭터의 도움을 받으며 갑자기 속구 구속이 150km에 이르고 변화구 각이 예리해지는 등 큰 폭으로 기량이 상승했다.
야구팬들에게 각인된 190cm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150km대의 일품 강속구 이미지는 이 때에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량향상을 기반으로 3학년이던 1991년 전국 최고의 고교 투수 중 한 명으로 맹위를 떨쳤다.
이 때 조성민 본인은 휘문고 임선동을 유일한 라이벌로 여겼고, 실제로 1991년 봉황기 8강에서 둘은 선발 맞대결을 벌여 신일고가 4:1로 이긴 적도 있다.
(1실점은 임선동에게 맞은 홈런.) 당시 임선동-조성민을 뒤쫓는 넘버3으로 경기고 손경수가 있었다.
당시 야구인들과 팬들은 임-조-손 세 명을 서울지역 고교생 '투수 트로이카'라고 불렀으며, 그 뒤를 박찬호, 염종석, 정민철, 안병원, 최원호, 박재홍, 손혁 등이 쫓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조성민 본인은 92년 드래프트에서 최상위 지명을 받을 것을 예상했는데, 그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
서울권 1차 지명에서 선지명 권리가 있었던 LG는 임선동을 선택하고, 이어서 OB는 손경수를 선택해버린 것.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임선동과 손경수는 프로 직행을 고려하고 있었기에 지명권을 날릴 염려가 적었다는 것. 반면 조성민은 대학에 먼저 가겠다는 의지가 컸고 구단측에 이에 대한 간도 보지 않는 바람에, 지명권도 날리고 임선동 손경수를 모두 LG에 빼앗기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기 싫었던 OB는 손경수라도 미리 건지려는 지명을 했던 것이다.
한 팀이 빅 3중에 두 명이나 데려갈 수 있다는 부분은 현행 기준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KBO 신인 드래프트 항목에 의하면 1991년 당시에는 고졸 연고 자유계약 제도가 있었다.
여기에 의하면, 연고지 출신 미지명 고졸 선수는 무제한 자유계약이 가능했다.
따라서 LG가 임선동을 지명하고 OB가 조성민을 지명했을 경우 손경수에 대해선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일어났을 것이고, 만약 여기서 OB가 지고 조성민마저 대학에 가버리면 손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구조가 이러했기 때문에 OB가 1순위였어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확률이 높으며, 이후에도 비슷한 파동이 여러 번 발생하자 KBO에선 고졸 연고 자유계약을 폐지해버리고 고졸 우선지명 제도로 바꾸게 된다.
조성민 입장에선 일단 고졸 연고 자유계약이 하필 이 때부터 시작됐다는게 불운했고, 본인이 간을 보지 않고 정직하게 대학행을 노린 것도 좋지 않게 작용했다.
하지만 그래도 4년뒤에 다시 승부하면 그만인 일이었는데, 라이벌에게 뒤쳐진 것은 물론이고 본인보다 못하다고 평가받던 선수에게 밀려 1차 지명을 받지 못하자 굉장히 자존심 상해했다는 후문이다.
본 문서 전체를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유난히 그는 인생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좋지 못한 선택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부터 이미 그런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임선동은 몰라도 손경수는 이미 임선동이 LG에 지명된 상황에서 충분히 OB가 먼저 지명할 만한 (기량 이외의) 이유가 있었는데도 명분에 더 집중했던 것. 대학에 가버려 지명권을 날릴 게 뻔한 선수를 구단이 그냥 지명해주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그가 확실한 입단 의사를 표명했으면 결과는 달랐을 확률이 높았다.
어쨌든 정작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빅3은 전부 대학에 진학했다.
임선동은 연세대로, 조성민은 고려대로, 손경수는 홍익대로 각각 진학했다.
당시 선수들에게 대학 진학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고교시절 말미에 미국에서 열린 한미일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에 그도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때는 몸이 좋지 않은 임선동 대신 박찬호의 출장 기회가 늘어났고 조성민도 나름대로 활약했지만 스카우터들의 시선은 가장 빠른 볼을 던진 박찬호에게 가 있었다.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일종의 복선이었던 셈이다.
5. 고려대학교 시절
박찬호(한양대), 임선동(연세대)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 중 하나였다.
2학년 시절인 1993년 9월 영남대와의 추계리그 경기에서 7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가 안타를 맞아 깨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최남수 감독이 조성민의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 안타깝게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48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결국 고려대는 10여일 후 열린 연세대와의 정기전을 감독 없이 치렀고, 끝내 승리하여 은사의 영전에 승리를 바칠 수 있었다.
6. 일본 프로야구 진출
학창시절의 국제대회 활약으로 슬슬 해외진출 분위기가 무르익게 된다.
고교 때 이미 국제대회 출전 기회를 가져 해외에 이름을 알린 것에 더해, 대학 재학중에도 미국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선발되어 박찬호와 함께 인상깊은 활약을 펼쳤다.
압도적인 강속구를 가진 박찬호에 비해서는 평가가 낮았지만 조성민 역시 메이저리그 일부 팀들의 관심을 얻는 데에는 성공했고, 이중에는 몇 년 후 봉중근을 영입하게 되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과거 최동원에게 입단계약을 제시하고 훗날 류현진을 통해 결국 한국 선수를 품에 안은 토론토 블루제이스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교차검증하기 전에는 확신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 거론된 계약금이 무려 백만 달러 수준으로 박찬호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때 링크가 났다는 토론토로 진출했으면 박찬호와 함께 사이좋게 메이저리그에서 롱런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웬일인지 그는 이 선택을 하지 않고 그냥 대학을 졸업해 버렸고 미국에도 가지 않았다.
나중에 밝힌 바로는 자신보다 평이 낮았던 선수가 먼저 미국에서 활약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만일을 위해 대학 졸업장을 확보하려는 의지도 있었고, 1호를 빼앗긴 미국무대보다는 일본 요미우리같은 명문팀에서 성공하면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 아니냐는 계산도 있었다.
그래서 요미우리로 진출했고, 요미우리에서는 계약금 1억 5천만엔이라는 거금이자 박찬호의 계약금(120만 달러)과 엇비슷한 액수를 맞춰주며 자존심은 세워주었지만 계약 기간이 무려 8년이었다.
당시의 조성민이 미리 알기는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 요미우리행도, 그리고 8년이나 되는 긴 계약기간도 결국 썩 좋지 않은 선택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도 고교 졸업당시 미지명된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어 별다른 분쟁 없이 일본 무대에 진출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 때가 대학을 졸업한 1996년. 비슷한 시기 임선동은 과거 자신을 지명한 LG의 동의없이 다이에와 입단계약을 맺는 바람에 소위 '임선동 파동'을 일으키며 끝내 해외 진출에 실패했다.
7.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과 짧은 전성기
이런 우여곡절 끝에 조성민은 1995년말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다.
상술했듯이 8년이라는 이례적으로 긴 계약이었는데, 이에 대한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이 8년 짜리 계약은 2020년 기준 아직도 NPB 역대 최장 계약기간 2위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일본인 FA 장기계약자 중에선 7년을 넘어가는 선수가 한 명도 없다.
2019년 야나기타 유키나 2020년 야마다 테츠토같은 유명 선수들이 원 소속팀과 7년 계약을 맺자 새삼스럽게 조성민의 장기계약 사례가 다시 소환되었을 정도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조성민. 옆의 등번호 33번은 당시 감독이던 나가시마 시게오. 등번호는 1997년까지는 51번을 사용했으며, 이후 퇴단할 때까지 21번을 유지했다.
유니폼 등록명으로는 'S. M. CHO'과 'CHO'를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일본진출 사례와는 달리 유망주 시절 건너가 거인팜에서 길러진 선수.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교진(巨人, 자이언츠)에게 관리 따위는 장식이었다.
신일고 시절부터 혹사당해왔던 팔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의 매일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1996년에는 그래서 2군에서 담금질을 하며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1997년 7월 처음으로 1군에 등록, 7월 5일에 한신 타이거즈를 상대로 8회말 등판, 데뷔전을 가졌다.
이후 중간계투와 중무리를 오가면서 1구원승 11세이브, ERA 2.89를 기록한다.
센트럴리그 소속이라 타석에도 들어서며 안타와 타점도 기록했다.
1998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 완봉과 완투를 곁들여가며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는 등 물오른 기량을 과시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올스타 멤버로도 선발되었다.
이 때까지가 그의 커리어 정점. 이 해는 마침 선동열이 주니치에서 철벽 마무리로 완벽하게 자리잡고, 박찬호도 다저스에서 3점대 ERA와 15승을 찍는 전성기 시절이었기에 한국 스포츠 언론에서 해외파 3인방으로 매일 대서특필했다.
선동열 조성민 박찬호가 동시에 세이브와 승리를 올린 날도 있었는데, 이런 날은 야구팬들의 화제가 하루종일 고정될 정도였다.
야구선수로서 본인이 구상했던 위치와 가장 근접한 것도 이 때였을 것이다.
그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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