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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김현식
金賢植 | Kim Hyun-s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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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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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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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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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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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1일 (향년 3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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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아파트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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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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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 메모리얼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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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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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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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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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홍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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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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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cm, 71kg, A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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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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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류진희
누나 김혜령, 남동생 김현수, 사촌 양국정 |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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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김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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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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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수유국민학교 (졸업)
보성중학교 (졸업) 명지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
소속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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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 신촌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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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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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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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유재하, 이문세, 김광석, 조용필, 이선희, 변진섭, 전영록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상징 중 하나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발전시키고 수면 위에 올린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다.
다.
다.
2. 어린 시절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할아버지 역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또 외할아버지 역시 만석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1964년생)이 있다.
1964년에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외가인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죽향초 동창의 말에 의하면 이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5학년 때 서울에 있는 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삼청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당연한 소리지만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1970년에는 서울보성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다.
사촌형인 양국정이 기타를 가르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부터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전교 3등으로 입학했고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선배의 악기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하자 이에 대들어 뒤엉켜 싸운 사건으로 밴드부에서 탈퇴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초에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여담인데 1972년(당시 중3) 기타만 들고 인천 작약도로 친구인 김동환과 같이 음악 여행을 떠났고 3년 뒤에 둘이 다시 음악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바로 이 당시에 사촌형 양국정의 소개로 종로에서 당시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에서 일하던 한 DJ를 찾아가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DJ는 바로 당시 20대 중반이던 개그맨 전유성이었다.
전유성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어린 김현식이 부른 노래에 감탄하며 "넌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아까워. 그야말로 가수로 나가면 전설이 될 거다!"라며 적극적으로 가수가 되길 권유했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때 나이를 5~6살은 올려 소개했다고. 이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이때 이장희의 남동생 이승희를 만나게 된다.
집안 배경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할아버지 역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또 외할아버지 역시 만석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1964년생)이 있다.
1964년에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외가인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죽향초 동창의 말에 의하면 이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5학년 때 서울에 있는 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삼청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당연한 소리지만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1970년에는 서울보성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다.
사촌형인 양국정이 기타를 가르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부터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전교 3등으로 입학했고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선배의 악기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하자 이에 대들어 뒤엉켜 싸운 사건으로 밴드부에서 탈퇴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초에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여담인데 1972년(당시 중3) 기타만 들고 인천 작약도로 친구인 김동환과 같이 음악 여행을 떠났고 3년 뒤에 둘이 다시 음악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바로 이 당시에 사촌형 양국정의 소개로 종로에서 당시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에서 일하던 한 DJ를 찾아가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DJ는 바로 당시 20대 중반이던 개그맨 전유성이었다.
전유성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어린 김현식이 부른 노래에 감탄하며 "넌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아까워. 그야말로 가수로 나가면 전설이 될 거다!"라며 적극적으로 가수가 되길 권유했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때 나이를 5~6살은 올려 소개했다고. 이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이때 이장희의 남동생 이승희를 만나게 된다.
3. 가수 활동
4. 사망
결국 1990년 11월 1일 오후 5시 20분에 자신의 자택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아파트에서 간경화로 인해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누나인 김혜령이 임종을 지켰고,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전날 각혈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 그리 빨리 뜰 줄은 몰랐으며 당일 불과 2시간 전인 오후 3시경에 김현식이 전화로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얘기해서 전혀 짐작도 못했다고 한다.
다음 날 그의 누나에게 "갔어요."라고 한 마디로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이때 김현식은 겨우 32살이라는 한창 젊은 나이였다.
2010년 김현식 2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에 나온 김영 사장이 회상하길, 전화를 받고 믿기지 않아서 "그럴 리가 없어! 어제 겨우 두 시간 전에 현식이가 나한테 밝게 전화하면서 내일이라도 녹음 들어간다고 했다고! 그런데 현식이가 죽었단 말이야?!"라면서 소리쳤을 정도로 충격받았다고 한다.
김혜령은 선배였던 한영애를 찾아가 "언니... 현식이 갔어요."라고 말한 얘기에 한영애는 "스튜디오 왔다 갔다고요? 근데 그게 왜요?"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갔다구요, 저 하늘로..."라고 다시 얘기했는데, 이때 온몸에 힘이 풀리며 쓰러졌다고 한다.
사후 그는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가 경기도 성남시 야탑3동에 위치한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된다.
그의 묘비에는 1집 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의 가사와 할머니란 가사가 적혀있다.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를 제외한 실질적 유작인 5집 앨범 '넋두리' 앨범이 바로 이때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 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다.
김영 사장이 포기하자는 말에도 각혈을 하면서 죽어갈 때까지 엄청난 유작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의 누나인 김혜령이 임종을 지켰고,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전날 각혈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 그리 빨리 뜰 줄은 몰랐으며 당일 불과 2시간 전인 오후 3시경에 김현식이 전화로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얘기해서 전혀 짐작도 못했다고 한다.
다음 날 그의 누나에게 "갔어요."라고 한 마디로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이때 김현식은 겨우 32살이라는 한창 젊은 나이였다.
2010년 김현식 2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에 나온 김영 사장이 회상하길, 전화를 받고 믿기지 않아서 "그럴 리가 없어! 어제 겨우 두 시간 전에 현식이가 나한테 밝게 전화하면서 내일이라도 녹음 들어간다고 했다고! 그런데 현식이가 죽었단 말이야?!"라면서 소리쳤을 정도로 충격받았다고 한다.
김혜령은 선배였던 한영애를 찾아가 "언니... 현식이 갔어요."라고 말한 얘기에 한영애는 "스튜디오 왔다 갔다고요? 근데 그게 왜요?"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갔다구요, 저 하늘로..."라고 다시 얘기했는데, 이때 온몸에 힘이 풀리며 쓰러졌다고 한다.
사후 그는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가 경기도 성남시 야탑3동에 위치한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된다.
그의 묘비에는 1집 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의 가사와 할머니란 가사가 적혀있다.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를 제외한 실질적 유작인 5집 앨범 '넋두리' 앨범이 바로 이때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 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다.
김영 사장이 포기하자는 말에도 각혈을 하면서 죽어갈 때까지 엄청난 유작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5. 후일담
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번, 주인공 |
|
PART 1
터틀맨 |
PART 2
김현식 |
6. 여담
- 김현식 2집 커버. 가수로서 정체성은 블루스, 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록밴드들의 스타일이자 주류였던 백두산, 시나위 등의 가죽바지, 장발 같은 스테레오타입 록커와는 거리가 먼 보이스와 비주얼로 2집 때부터 크게 인기를 얻었다.
-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굉장한 미성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음색을 바꾸려는 본인의 노력과, 평소에 즐겨 하던 술담배의 영향이 겹쳐 굵은 목소리 + 쇳소리가 나는 허스키한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다.무릎팍 도사 김건모 편에서도 잠시 비교용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6집 <내 사랑 내 곁에>의 음색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로 1집에서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미성이었다. 1집의 타이틀 <봄 여름 가을 겨울>, 2집의 <사랑했어요>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보컬은 특유의 미성과 가성의 능숙한 사용으로 쭉쭉 뻗어올라가는 고음을 보여준다. 2집을 내기 전인 1984년 3월, 7인치 LP판 싱글을 낸 적이 있는데 '사나이 노래' 라는 타이틀을 냈었다. 1집과는 달리 굉장히 굵지만 허스키와는 거리가 먼 창법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다만 상업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먼 실험성이 돋보였던 앨범인지라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고가에 거래되는 음반이 되어버렸다.
- 김현식은 음악 여행을 겸하여 한때 국내 사찰들의 종소리를 들으러 다녔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소리에 대해 연구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 의외로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싱어송라이터다. 봄여름가을겨울, 사랑했어요, 추억만들기 등의 노래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다. 라이브나 녹음에서 노래 하다가 음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에 대해 이해가 뛰어나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라디오 스타에서 김종진이 그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그냥 자기 멋대로 부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당대에 한 성깔 하는 선배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이자 리더였던 장기호는 뮤직비디오를 야외에서 추운 겨울날 너무 오랫동안 찍자 김현식이 짜증을 내며 "야! 악기 싸!"라고 하면서 가려고 하자 삿대질과 잔소리에 질책하듯 말리다가 김현식에게 죽빵을 맞고 쌍코피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한때 그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날 정도로 절친했던 김장훈 역시 조금이라도 잘못한게 있으면 김현식한테 굉장히 많이 맞았다고 한다. 이런 류의 얘기를 가볍게하는 것을 보면 두들겨 맞은 수준은 아닌것으로 보이나, 어쨌거나 맞긴 맞은듯 보인다. 워낙 명곡들을 남기고 간, 죽기까지 노래하고 떠난 가객으로서의 평이 강해서 그렇지 정도가 심했으면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만한 논란거리였을 것이다.하지만 김현식이 활동하던 80년대에는 대한민국 사회의 폭력적인 경향이 매우 강했으므로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즉 당시에는 지금처럼 큰 논란이 될 행위라기보다는 조금 성깔 있는 선배 음악가 형 정도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당사자들도 웃으며 회상하듯 이야기한것이 많았고 그의 그런 폭력을 언급하기보단 그가 베푼 미담을 더 많이 덧붙여서 이야기했다. 위의 일화에 엮인 봄여름가을겨울 멤버 두 사람은 방송 내내 김현식을 칭송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어찌됐건 당사자인 후배들 입장에선 "존경하는 선배의 괴팍한 일면" 정도로 받아들였단 의미. 또 그냥 폭력으로 갈구기만 한게 아니라 자신이 동생들을 데려다주다가 아예 타고 다니라며 자동차를 주는 등 미담도 굉장히 많다. 위의 김종진과 전태관 뿐 아니라 수많은 가수들이 김현식이 자신들에게 베푼 미담들을 밝히고, 도움을 받았던 사례들을 얘기했다. 가수 정경화는 후배를 잘 이끌어주고 많은 격려와 도움을 주었다고 밝혔으며 비오는날의 수채화를 같이 부른 권인하는 김현식을 대인이라고 부르며 그의 베품과 후배들에 대한 사랑을 담은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즉, 단순히 폭력으로 후배들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잘 대해주되 종종 혼내는 상황에서 폭력을 썼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건의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모두 그리워하고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하는데다 수많은 좋은 일화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80년대의 스타일을 담은 가수였다고 볼 수 있다. 정말 악평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알코올 중독에 폭력배였다면 그의 음악이 아무리 좋았다한들 좋은 기억만이 남지 않고 또 그가 이렇게 좋은 가수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즉 야구 감독 김응용과 비슷한 유형인 셈.
- 1992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이 개봉했지만 흥행이나 평은 그리 안 좋았다. 김형철이 김현식을 맡았지만 이젠 잊힌 영화가 되어버렸다.
- 1996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머나먼 나라 초반부에서 김현식이 자주 언급되었다. 초반부는 배경이 1990년도였는데, 극중 한수(김민종)가 김현식의 광팬이어서 운하(김희선)를 데리고 김현식 콘서트에 갔고, 또한 한수는 김현식이랑 악수한 손을 영광으로 여겨 붕대를 감고 다녔다. 물론 김현식이 사망한 날 꽐라가 된채 노래방에서 <언제나 그대 내 곁에>만 20번 이상 부르는 것도 모자라, 집에 돌아온 후 울면서 깽판을 부리기도 했다. 드라마 오프닝 자체가 <언제나 그대 내 곁에> 리메이크 버전이고, 훗날 김민종도 따로 리메이크 버전을 불렀다.
- 그의 아들 김완제 씨 역시 아버지가 엄하고 무서우며 고집이 셌다고 한다. 어릴 때를 떠올리는 김완제씨.
- 이승철이 스승으로 모시는 가수라고 한다. 이승철이 이를 언급한 맥락에 따르면 직접 가르침을 사사한 적은 없지만 그의 노래에 큰 감명을 받고 즐겨 듣고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고 여기는 듯 하다.
- 위에도 서술되어있다시피 김장훈과도 인연이 깊은데 김현식의 어머니와 김장훈의 어머니 두 분이 친자매처럼 친했고 이로 인해 김장훈과도 절친했었다. 오죽하면 성이 같고 둘 다 불같은 성격이라 김장훈은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날 정도였었다. 이 덕분에 김장훈은 음악적인 부분에서 김현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 1989년에 데뷔한 가수 김상아도 '사랑했어요'라는 노래를 발표해 히트시킨 적이 있다. 물론 서로 관계없는 별개의 곡이며, 김현식의 곡은 1984년에 발표되었고 김상아는 1990년부터 주로 활동했기에 시간차도 크다. 다만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동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혼동하는 사람도 없진 않은 모양.
- 2019년 9월 그의 노래를 뮤지컬 넘버로 편곡하여 <사랑했어요>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개봉하였다. 인터파크 공연 정보
- 여기서 죽향초등학교시절 사진을 볼 수 있다. 동창의 말에 따르면 김현식의 집에는 커피와 통기타같은 신식 문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 래퍼 BILL STAX가 정규앨범 'DETOX'의 타이틀곡인 'Lonely Stoner'의 첫 마디를 비처럼 음악처럼의 가사에서 인용하였다.
- 김현식의 외할아버지는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을 한 상당한 지식인이였다. 성서조선이라는 무교회주의 기독교계 잡지의 창간멤버였다.
- 부친처럼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 김완제는 2010년, 김현식 20주년 앨범에서 아버지의 곡인 내사랑 내곁에를 불렀다. 또 신해철의 그대에게도 커버한 바가 있다.
- 히든싱어 원조가수 후보로 매 시즌 올라와 있고 많은 시청자들이 바라고 있지만 난항이 많다. 실제 부르는 모창자와 헷갈리게 만들 만한 디지털 소스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그 김광석보다도 6년이나 사망이 빠르기 때문. 그런데 2022년 방영될 시즌 7에서 원조가수 후보로 올라왔고 시즌 7의 마지막 가수로 11월 4일에 방송된다. 그만큼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것이 반영된 듯 하다.
- 동생 김현수는 김현식이 한창 활동할 때 미성년자의 모습이었던 걸로 보아 나이 차이가 상당하며, 생전에 많이 챙긴 아버지 같은 형이었다 밝혔다.
- 2015년부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소관, 지니뮤직 후원으로 매 년 김현식 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7. 관련 문서
- 김(성씨)/목록
- 가수/한국
- 유재하
- 봄여름가을겨울
- 김종진
- 전태관
- 권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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