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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제6대 주석
후진타오 胡锦涛 | Hú Jǐntā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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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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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2월 21일 (7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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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타이저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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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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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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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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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진타오 주석의 초상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2003년부터 2013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이른바 "과학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당의 행동 강령에 집어넣으면서 명실상부한 4세대 중국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과학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내세운 발상이라고 한다.
2007년의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으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뒤의 두가지 아이디어보다 원자바오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기도 한다.
재임 당시 인권 탄압으로 큰 비판을 받았지만, 외교 면에서는 중국 공산당 내 온건파의 대표주자로 꼽혔다.
강경파인 현 시진핑과는 정반대인 셈. 후진타오는 스승인 후야오방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유지와 더불어 당내 민주화를 꿈꾸었고, 시진핑은 권위주의와 당권주의를 기반으로 중국을 다스리길 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시진핑의 강압통치에 비하면 후진타오는 약과였다 할 정도이다.
문화검열은 후진타오는 자신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허용/검열하였고 티베트 사태나 위구르 사태에 강경진압을 하여 비판을 받지만 강경책을 쓰는 동시에 어느 정도 주민들을 달래주는 온건책을 썼었지만, 시진핑은 그걸 넘어 위구르 티베트 주민들에게 온건책은 커녕 후진타오보다 한 술 더뜬 강경탄압 사회문제 노조활동을 검열 강경 탄압했다.
그래서 현 시진핑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차라리 후진타오나 장쩌민 시절이 그나마 나았다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 북한 문제를 제외하면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도 잘 지내려 했으며 미국과도 괜찮은 관계를 가지려고 한 인물이였다.
또한, 시진핑 시대보다 경제 성장률도 우수했다.
다만 티베트와 위구르, 파룬궁 문제에서는 현 시진핑과 비슷한 정도로 강경파였다.
그러나 재임 기간 내 중국이 내정에서 인권탄압이나 독재를 자행했다는 점은 현재의 시진핑과 다를 바가 없어 독재자라고 비판받기는 한다.
일단 인권을 중시하는 진보, 리버럴 진영에서는 후진타오쪽도 대체로 비판받는 한편 인권문제보다 중국의 외교적 팽창주의를 경계하는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인권 탄압 문제는 있어도 시진핑 현 주석보다 온건한 편인데다 대외적으로는 친서방 정책을 유지했기에, 그래도 중국 역대 지도자들치고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늗다.
다.
이른바 "과학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당의 행동 강령에 집어넣으면서 명실상부한 4세대 중국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과학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내세운 발상이라고 한다.
2007년의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으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뒤의 두가지 아이디어보다 원자바오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기도 한다.
재임 당시 인권 탄압으로 큰 비판을 받았지만, 외교 면에서는 중국 공산당 내 온건파의 대표주자로 꼽혔다.
강경파인 현 시진핑과는 정반대인 셈. 후진타오는 스승인 후야오방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유지와 더불어 당내 민주화를 꿈꾸었고, 시진핑은 권위주의와 당권주의를 기반으로 중국을 다스리길 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시진핑의 강압통치에 비하면 후진타오는 약과였다 할 정도이다.
문화검열은 후진타오는 자신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허용/검열하였고 티베트 사태나 위구르 사태에 강경진압을 하여 비판을 받지만 강경책을 쓰는 동시에 어느 정도 주민들을 달래주는 온건책을 썼었지만, 시진핑은 그걸 넘어 위구르 티베트 주민들에게 온건책은 커녕 후진타오보다 한 술 더뜬 강경탄압 사회문제 노조활동을 검열 강경 탄압했다.
그래서 현 시진핑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차라리 후진타오나 장쩌민 시절이 그나마 나았다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 북한 문제를 제외하면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도 잘 지내려 했으며 미국과도 괜찮은 관계를 가지려고 한 인물이였다.
또한, 시진핑 시대보다 경제 성장률도 우수했다.
다만 티베트와 위구르, 파룬궁 문제에서는 현 시진핑과 비슷한 정도로 강경파였다.
그러나 재임 기간 내 중국이 내정에서 인권탄압이나 독재를 자행했다는 점은 현재의 시진핑과 다를 바가 없어 독재자라고 비판받기는 한다.
일단 인권을 중시하는 진보, 리버럴 진영에서는 후진타오쪽도 대체로 비판받는 한편 인권문제보다 중국의 외교적 팽창주의를 경계하는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인권 탄압 문제는 있어도 시진핑 현 주석보다 온건한 편인데다 대외적으로는 친서방 정책을 유지했기에, 그래도 중국 역대 지도자들치고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늗다.
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후진타오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에서 태어났다.
명나라 때 절강순무로 재직하며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호종헌의 직계 자손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찻집 주인 겸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후진타오가 7살 때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의 후진타오와 학생들1962년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입학했고, 1965년 졸업하고 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벌어졌지만, 하방(下放)되지 않고 1968년 간쑤성의 류자샤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자원하여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문화대혁명의 폭풍을 피해갔다.
이후 간쑤성에서 계속 기술공무원으로 경력을 쌓다가 지방 시찰을 나온 후야오방의 눈에 띄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탁되었다.
장년기 시절의 후진타오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5년 9월, 중국공산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1985년 구이저우성 당 서기로 임명되었는데, 구이저우가 깡촌 오브 깡촌인데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후야오방도 1987년 1월 실각하면서, 사실상 여기가 그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점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티베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이어지자, 1988년 12월 당 중앙은 후진타오를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하여 라싸로 급파하였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단호하게 소요를 진압하면서 강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다.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차세대 주자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 되었다.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맡은 데 이어 2003년 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후진타오와 덩샤오핑일설에 의하면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지위를 넘겨주는 대신 차기 국가 주석은 후진타오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장쩌민도 이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국가 주석에 등극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다.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정부수반)는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이다.
명나라 때 절강순무로 재직하며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호종헌의 직계 자손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찻집 주인 겸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후진타오가 7살 때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의 후진타오와 학생들1962년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입학했고, 1965년 졸업하고 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벌어졌지만, 하방(下放)되지 않고 1968년 간쑤성의 류자샤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자원하여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문화대혁명의 폭풍을 피해갔다.
이후 간쑤성에서 계속 기술공무원으로 경력을 쌓다가 지방 시찰을 나온 후야오방의 눈에 띄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탁되었다.
장년기 시절의 후진타오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5년 9월, 중국공산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1985년 구이저우성 당 서기로 임명되었는데, 구이저우가 깡촌 오브 깡촌인데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후야오방도 1987년 1월 실각하면서, 사실상 여기가 그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점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티베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이어지자, 1988년 12월 당 중앙은 후진타오를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하여 라싸로 급파하였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단호하게 소요를 진압하면서 강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다.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차세대 주자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 되었다.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맡은 데 이어 2003년 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후진타오와 덩샤오핑일설에 의하면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지위를 넘겨주는 대신 차기 국가 주석은 후진타오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장쩌민도 이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국가 주석에 등극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다.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정부수반)는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이다.
2.2. 대국 굴기 - 대외적 치적
그의 통치 시대는 전반기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일어선다)'에 이어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의 '돌돌핍인(咄咄逼人)'까지 나아갔다.
중국은 그의 10년 사이 어느새 부쩍 성장하였다.
처음 4년간(2003년 말 ~ 2007년 말)에는 GDP가 12조 위안(1.5조 달러)에서 24조 위안(3조 달러)으로 2배, 무역액은 3.5배(6천억 달러 → 2조 1천억 달러)나 성장했고, 뒤의 5년 동안에도 계속 성장하여 2010년 일본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고 세계 2위로 올라갔다.
4배 ~ 5배로 증가한 외환 보유액은 이미 2007년 1조 5천억 달러로 세계 1위가 되었다.
여담으로 종합 주가 지수는 2003년말 1497에서 2005년 6월 998로 최저점을 찍었다가 2007년 5291, 2007년 말 6124로 급상승,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를 만나며 다시 추락하여 지금은 2200선까지 빠졌다.
국민 소득은 3천 달러가 채 안되던 상황에서 5천 달러까지 증가했다.
이는 환율 탓이 크긴 해서, 위안화로는 2002년 초 9천 위안에서 2010년 현재 3만 위안에 육박한다. 여하간, 5천 달러니 중진국에 진입했다.
대외적으로는 항공모함(랴오닝급)까지 도입했다.
중국은 그의 10년 사이 어느새 부쩍 성장하였다.
처음 4년간(2003년 말 ~ 2007년 말)에는 GDP가 12조 위안(1.5조 달러)에서 24조 위안(3조 달러)으로 2배, 무역액은 3.5배(6천억 달러 → 2조 1천억 달러)나 성장했고, 뒤의 5년 동안에도 계속 성장하여 2010년 일본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고 세계 2위로 올라갔다.
4배 ~ 5배로 증가한 외환 보유액은 이미 2007년 1조 5천억 달러로 세계 1위가 되었다.
여담으로 종합 주가 지수는 2003년말 1497에서 2005년 6월 998로 최저점을 찍었다가 2007년 5291, 2007년 말 6124로 급상승,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를 만나며 다시 추락하여 지금은 2200선까지 빠졌다.
국민 소득은 3천 달러가 채 안되던 상황에서 5천 달러까지 증가했다.
이는 환율 탓이 크긴 해서, 위안화로는 2002년 초 9천 위안에서 2010년 현재 3만 위안에 육박한다. 여하간, 5천 달러니 중진국에 진입했다.
대외적으로는 항공모함(랴오닝급)까지 도입했다.
2.3. 동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후진타오 중국 주석노다 요시히코 일본 수상후진타오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겉으로는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경제적으로도 한국, 일본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며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다.
대한민국 정부와의 관계도 좋았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북한의 편을 들어준 것을 제외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시진핑과는 달리 당시 대만의 민진당 정권에 대해서도 유화책을 쓰려고 했으며 인도, 베트남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 노력했다.
이러한 연유로 2002년에서 2012년 사이의 인도인과 베트남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시진핑 집권기의 중국과 비교해 굉장히 좋았다.
후진타오 집권 시기 한국과 일본 내에서는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다소 모자란 동네 바보형과 같은 이미지까지 존재했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흔히 대륙 시리즈라고 하여 중국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올리는 것이 굉장히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후진타오 시기의 중국이 가진 이미지를 잘 보여줬던 대목이다.
후임 시진핑 주석의 오만한 행보로 한국과 일본에서 중국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짱깨, 지나 등의 비하적인 명칭으로 중국을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졌지만 후진타오 시기에는 중국을 두고 스스로 대륙, 파트너라고 부르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이렇게 후진타오 시대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중국의 성장은 대한민국에게 있어서도 중국으로의 수출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어 경제 안정의 토대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한국을 존중하는 중국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비추어져 국가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지만 동북공정이나 이어도와 같은 실제적 위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다가오기도 했다.
후임 시진핑이 중국의 신세대이자 애국민족주의로 뭉친 소분홍 세대를 이끌고 노골적으로 한국을 상대로 동북공정과 문화공정을 진행한다면 후진타오는 한국을 상대로 온건하고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중국에 호감을 가지게 하고 뒤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따라서 후진타오 시대에 이미 고구려 역사 침탈이 본격화됐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조선족을 앞세워 한복을 등장시켰음에도 당시 한국 대중은 크게 중국에 반감을 가지거나 분노하지 않았으며 가볍게 논란만 되었을 뿐이다.
일본, 북한의 경우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위협의 본격화가 대표적이다.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최대 수출국 자리를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차지하였다.
일본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라는 입장을 이용한 후진타오는 무역과 자원을 무기로 일본을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당시 일본인을 경악시키기도 했다.
북한은 김정일 시기 북핵에 의한 대북 제재로 사실상 후진타오 시대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종속이 되어 위화도 황금평과 라진항을 50년간 임대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전랑 외교를 펼치는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는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펼치며 뒤에서 서서히 잠식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걷는 시진핑보다 후진타오가 장기적으로 훨씬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대한민국 정부와의 관계도 좋았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북한의 편을 들어준 것을 제외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시진핑과는 달리 당시 대만의 민진당 정권에 대해서도 유화책을 쓰려고 했으며 인도, 베트남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 노력했다.
이러한 연유로 2002년에서 2012년 사이의 인도인과 베트남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시진핑 집권기의 중국과 비교해 굉장히 좋았다.
후진타오 집권 시기 한국과 일본 내에서는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다소 모자란 동네 바보형과 같은 이미지까지 존재했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흔히 대륙 시리즈라고 하여 중국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올리는 것이 굉장히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후진타오 시기의 중국이 가진 이미지를 잘 보여줬던 대목이다.
후임 시진핑 주석의 오만한 행보로 한국과 일본에서 중국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짱깨, 지나 등의 비하적인 명칭으로 중국을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졌지만 후진타오 시기에는 중국을 두고 스스로 대륙, 파트너라고 부르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이렇게 후진타오 시대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중국의 성장은 대한민국에게 있어서도 중국으로의 수출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어 경제 안정의 토대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한국을 존중하는 중국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비추어져 국가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지만 동북공정이나 이어도와 같은 실제적 위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다가오기도 했다.
후임 시진핑이 중국의 신세대이자 애국민족주의로 뭉친 소분홍 세대를 이끌고 노골적으로 한국을 상대로 동북공정과 문화공정을 진행한다면 후진타오는 한국을 상대로 온건하고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중국에 호감을 가지게 하고 뒤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따라서 후진타오 시대에 이미 고구려 역사 침탈이 본격화됐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조선족을 앞세워 한복을 등장시켰음에도 당시 한국 대중은 크게 중국에 반감을 가지거나 분노하지 않았으며 가볍게 논란만 되었을 뿐이다.
일본, 북한의 경우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위협의 본격화가 대표적이다.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최대 수출국 자리를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차지하였다.
일본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라는 입장을 이용한 후진타오는 무역과 자원을 무기로 일본을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당시 일본인을 경악시키기도 했다.
북한은 김정일 시기 북핵에 의한 대북 제재로 사실상 후진타오 시대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종속이 되어 위화도 황금평과 라진항을 50년간 임대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전랑 외교를 펼치는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는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펼치며 뒤에서 서서히 잠식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걷는 시진핑보다 후진타오가 장기적으로 훨씬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2.4. 경제 성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인권 문제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때의 후진타오재임 10년(2002-2012)간 중국의 경제규모가 네 배 이상 성장했다.
(2002년 1.4조달러, 2012 8.5조 달러) 대침체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거품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더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현황은 중국/경제를 참조.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골치덩이.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다.
특히 상하이나 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진다고 한다.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한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같은 느낌도 난다.
또한 이 시기부터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땜빵 하고 있다.
비록 경제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1억 5,000만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문화 대혁명 직후에 1인당 소득에서 인도보다도 경제 수준이 더 낮았지만 현재는 1인당 소득은 인도보다 4배 이상이다.
비교 대상국들을 보면 중국 정부가 경제를 잘못 운용했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된다.
그냥 90년대 말 중국이 시궁창 of 시궁창 후진국이었던게 문제일 뿐.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 모두 잡기는 힘들며, 분배에 신경을 안쓰는 것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지만, 중국 정부가 무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25만 ~ 30만명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돼 있으며,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7%이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올림픽 경기장을 짓기 위해서 강제 이주 등의 조치가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시진핑이 더한 짓거리를 해대고 있으니 인권문제에선 후진타오가 더 나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후진타오도 인권면에서는 정상으로는 볼 수 없다.
(2002년 1.4조달러, 2012 8.5조 달러) 대침체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거품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더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현황은 중국/경제를 참조.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골치덩이.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다.
특히 상하이나 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진다고 한다.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한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같은 느낌도 난다.
또한 이 시기부터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땜빵 하고 있다.
비록 경제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1억 5,000만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문화 대혁명 직후에 1인당 소득에서 인도보다도 경제 수준이 더 낮았지만 현재는 1인당 소득은 인도보다 4배 이상이다.
비교 대상국들을 보면 중국 정부가 경제를 잘못 운용했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된다.
그냥 90년대 말 중국이 시궁창 of 시궁창 후진국이었던게 문제일 뿐.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 모두 잡기는 힘들며, 분배에 신경을 안쓰는 것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지만, 중국 정부가 무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25만 ~ 30만명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돼 있으며,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7%이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올림픽 경기장을 짓기 위해서 강제 이주 등의 조치가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시진핑이 더한 짓거리를 해대고 있으니 인권문제에선 후진타오가 더 나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후진타오도 인권면에서는 정상으로는 볼 수 없다.
2.5. 미국과의 관계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상단)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하단)후임 시진핑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여 세계 정세를 뒤흔들고 최악의 미중 관계를 만든 것과 달리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미국과 상당히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 상단은 2006년 04월 21일, 후진타오 주석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공식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받았을 때의 모습이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왼쪽 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부시 대통령은 후 주석을 준비된 계단으로 안내하려고 다른 계단으로 내려갈려는 후 주석의 소매를 잡아끈 것이나, 이때 후 주석이 짜증을 내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방영됐다.
소매를 잡아끄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입고 있었던 양복이 찢어졌는데, 알고보니 이게 또 짝퉁 이태리 양복임이 밝혀져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일부러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도 없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미국의 모든 방송사와 중국 국영 방송인 CC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서 말이 매우 많았다.
당연히 중국측에서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라며 비판했고, 미국측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반면 퇴임 전까지 오바마하고도 관계는 나름대로 좋은관계를 유지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이른바 G2라며 세계 양강으로 대우했고 대신 그만한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했다.
이는 중동 문제에서 발을 빼는 대신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일원이었다.
사진 상단은 2006년 04월 21일, 후진타오 주석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공식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받았을 때의 모습이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왼쪽 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부시 대통령은 후 주석을 준비된 계단으로 안내하려고 다른 계단으로 내려갈려는 후 주석의 소매를 잡아끈 것이나, 이때 후 주석이 짜증을 내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방영됐다.
소매를 잡아끄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입고 있었던 양복이 찢어졌는데, 알고보니 이게 또 짝퉁 이태리 양복임이 밝혀져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일부러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도 없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미국의 모든 방송사와 중국 국영 방송인 CC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서 말이 매우 많았다.
당연히 중국측에서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라며 비판했고, 미국측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반면 퇴임 전까지 오바마하고도 관계는 나름대로 좋은관계를 유지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이른바 G2라며 세계 양강으로 대우했고 대신 그만한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했다.
이는 중동 문제에서 발을 빼는 대신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일원이었다.
2.6. 퇴임
- 자신이 첫 몇 년 간 장쩌민의 눈치를 보며 반쪽짜리 국가원수였던 설움을 후임자에게는 겪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즉 자신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퇴임함으로써 아직도 상당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장쩌민까지 함께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정치적 메시지로 보인다. 실제로 장쩌민은 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도 후진타오 바로 옆자리를 항상 차지하는 등 아직 막강한 권력이 있음을 과시하였다.
-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바로 넘겨주었다는 관측이다.
- 중앙 군사위 주석 직을 바로 넘겨준 것 자체가 '빚지게 만든 것'이라는 의견이다. 즉 바로 넘겨주는 은혜를 베풀어 자신과 계파인 공청단을 해코지하는 것을 막은 의도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다. 사실 둘 다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시진핑의 집권 자체가 후진타오의 장쩌민에 대한 대항 의식 때문이고 둘이 연계해 장쩌민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진실은 후진타오 본인만 알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방 다음의 반부패 타겟은 공청단인게 확실해져가는 분위기라 시진핑에게 통수를 맞았다는 의견도 있다.
3. 고통과 수난의 10년 권좌
권좌를 차지한 10년 동안 전임자 장쩌민의 상왕 행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당 총서기를 이양받았지만 장쩌민은 핵심 요직인 중앙 군사위 주석직을 장악한 상태에서, 기존의 7인 체제였던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의 정원을 9명으로 확대하고 해당 상무 위원에 무소불위의 권좌가 되어버린 정법위 서기(당시 정법위 서기는 장쩌민의 측근인 뤄간이 역임하고 있었고 그 저우융캉은 공안 부장에 재직할 시절이다.
)까지 편입시키면서, 상무위 9명 중 6명 가량을 상하이방으로 채워넣다시피했다.
결정적으로 장쩌민은 궈보슝과 쉬처이허우를 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삼아,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게끔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들은 훗날 후진타오가 중앙 군사위 주석을 인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허수아비로 맴돌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궈보슝와 쉬처이허우가 매관 매직을 통하여 군부 내에 세력을 키우고 후진타오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까닭에, 후진타오 집권시절에 생긴 말이 정령불출 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었다.
당시 후진타오의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로 2004년, 상하이 당 서기였던 천량위가 당 중앙의 거시적 조절 통제가 상하이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면서 원자바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일개 직할시 당 서기가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 위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하극상이었지만, 정작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를 하지 못했다.
원자바오는 총리급인 상무위원인데 부총리급인 정치국원 천량위에 갈굼에 당할 정도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광역시장겸 시도당위원장이 국무총리에게 대드는 꼴이다.
이렇듯 사방이 장쩌민에게 포위당해, 후진타오가 본인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던 기류는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가 부패 혐의로 인해 낙마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후계자 리커창을 지원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장쩌민과의 권력암투 끝에 두 사람은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합의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 모두 속내가 달랐던터라, 후진타오는 리커창, 장쩌민은 자신의 절친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를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었는데, 보시라이가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사고를 저지르면서 후진타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리커창이 최고지도자가 되고 후진타오계가 상무위원회를 장악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던 장쩌민은 후진타오의 심복 링지화 중앙판공청 주임(쉽게 말해 대통령비서실장) 아들이 페라리를 몰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이용, 링지화의 대규모 부정축재를 공론화시켜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회 다수를 장악하려던 후진타오의 계획을 무산시킨 결과, 상무 위원회 7명 중 후진타오계인 공청단은 2명 만이 진출하였고 최고지도자도 리커창이 아닌 시진핑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국가 주석과 중앙 군사위 주석을 한 번에 넘겨주어 상왕정치를 하지않는 대신, 장쩌민도 함께 은퇴시킬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소위 동귀어진 작전. 그래도 상하이방의 위세가 있으니 장쩌민의 영향력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시진핑은 취임하자마자 당과 군의 장쩌민 측근들은 물론 아들까지 부정부패 혐의로 처벌하며 장쩌민을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다.
후진타오로서는 매우 통쾌했겠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공청단도 숙청과 좌천을 당하면서 시진핑 1인 독재체제가 굳어졌다.
결국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완전히 실권을 잃고 전직 국가원수의 예우만 받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2002년, 당 총서기를 이양받았지만 장쩌민은 핵심 요직인 중앙 군사위 주석직을 장악한 상태에서, 기존의 7인 체제였던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의 정원을 9명으로 확대하고 해당 상무 위원에 무소불위의 권좌가 되어버린 정법위 서기(당시 정법위 서기는 장쩌민의 측근인 뤄간이 역임하고 있었고 그 저우융캉은 공안 부장에 재직할 시절이다.
)까지 편입시키면서, 상무위 9명 중 6명 가량을 상하이방으로 채워넣다시피했다.
결정적으로 장쩌민은 궈보슝과 쉬처이허우를 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삼아,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게끔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들은 훗날 후진타오가 중앙 군사위 주석을 인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허수아비로 맴돌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궈보슝와 쉬처이허우가 매관 매직을 통하여 군부 내에 세력을 키우고 후진타오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까닭에, 후진타오 집권시절에 생긴 말이 정령불출 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었다.
당시 후진타오의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로 2004년, 상하이 당 서기였던 천량위가 당 중앙의 거시적 조절 통제가 상하이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면서 원자바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일개 직할시 당 서기가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 위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하극상이었지만, 정작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를 하지 못했다.
원자바오는 총리급인 상무위원인데 부총리급인 정치국원 천량위에 갈굼에 당할 정도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광역시장겸 시도당위원장이 국무총리에게 대드는 꼴이다.
이렇듯 사방이 장쩌민에게 포위당해, 후진타오가 본인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던 기류는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가 부패 혐의로 인해 낙마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후계자 리커창을 지원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장쩌민과의 권력암투 끝에 두 사람은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합의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 모두 속내가 달랐던터라, 후진타오는 리커창, 장쩌민은 자신의 절친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를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었는데, 보시라이가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사고를 저지르면서 후진타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리커창이 최고지도자가 되고 후진타오계가 상무위원회를 장악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던 장쩌민은 후진타오의 심복 링지화 중앙판공청 주임(쉽게 말해 대통령비서실장) 아들이 페라리를 몰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이용, 링지화의 대규모 부정축재를 공론화시켜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회 다수를 장악하려던 후진타오의 계획을 무산시킨 결과, 상무 위원회 7명 중 후진타오계인 공청단은 2명 만이 진출하였고 최고지도자도 리커창이 아닌 시진핑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국가 주석과 중앙 군사위 주석을 한 번에 넘겨주어 상왕정치를 하지않는 대신, 장쩌민도 함께 은퇴시킬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소위 동귀어진 작전. 그래도 상하이방의 위세가 있으니 장쩌민의 영향력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시진핑은 취임하자마자 당과 군의 장쩌민 측근들은 물론 아들까지 부정부패 혐의로 처벌하며 장쩌민을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다.
후진타오로서는 매우 통쾌했겠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공청단도 숙청과 좌천을 당하면서 시진핑 1인 독재체제가 굳어졌다.
결국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완전히 실권을 잃고 전직 국가원수의 예우만 받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4. 기타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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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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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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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소재 칭화대학 수리공정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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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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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시짱 자치구 당 서기, 14차 당 대회 최연소 정치국 상무위원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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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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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당시 당국의 무력 진압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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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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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중점 배양 후계자로 지명, 당 서열 7위로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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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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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재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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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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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부주석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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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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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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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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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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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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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문, 부시와 재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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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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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총서기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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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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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석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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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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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군사위 주석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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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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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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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편에 따르면 대학 시절 한 과목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을 받았다고 한다.
- 그의 아버지는 일본 치하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만두고 찻집을 운영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찻집을 빼앗겼다.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3년에 일어난 사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태 진상을 은폐한 자들을 엄벌에 처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사스 사태가 진정된 후에는 자국의 책임이라는 등 사과하기도 했다.
- 애처가라고 한다. 아내 류용칭이 자신의 부탁으로 공산당원으로서의 출세를 포기하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아내를 아껴준다는 뒷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 의외로 키가 175cm으로 큰 편이었다. 현직 국가주석 당시 사진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168cm)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173cm)보다 확연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키가 178cm 전후로 추정되는 시진핑 주석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2006년 아베 신조(175cm)와의 회담 당시에도 신장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많이 노쇠하여 173cm로 줄었지만 여전히 객관적으로 봐도 덩치가 큰 편인 시진핑과는 큰 차이가 없다.
- 자식이 두명 있는데 큰아들 후하이펑(胡海峰, 1971년생)은 기업인으로 재직하다가 2010년대 관리로 전직해서 저장성 자싱시에서 부시장까지 역임했다. 2019년 9월 일부 반중 화교 언론들이 "시진핑이 후진타오를 달래기 위해 그의 아들인 후하이펑을 시안시장으로 임명한다"는 설을 풀었으나 임명되지 않았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각국 정상들을 줄줄이 세워놓고 황제처럼 알현을 받았다.쪼잔한 녀석 관련 기사 1
-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기도 했다. 특히 대장금을 엄청나게 즐겨 봤다고 하며, 그 덕택에 이영애를 직접 초대해서 직접 만나기도 했다.
- 후진타오 자신은 그토록 강희제를 본받자고 했는데 정작 자신의 빽으로 정권을 잡은 후임 시진핑이 강희제의 흔적을 문화 정책 등에서 지우다시피 하는 느낌이라 후진타오 입장에선 답답할 듯. 현재 중국을 완전히 장악한 독재자가 된 시진핑을 보면 시진핑의 야욕을 가늠치 못한 후진타오의 최대 실책에 가깝다는 이야기도 있다.
- 중국의 역대 집권자들 중에서 화궈펑을 제외하면 가장 짧은 집권 기간을 기록했다. 원래 관료출신으로 본인의 권력 의지가 아니라 덩샤오핑의 낙점으로 정권을 승계한지라 권력확대나 집권연장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국가주석 임기만 따지자면 장쩌민과 마찬가지로 10년이다.
- 중국 역대 최고지도자 중 가장 온건한 인물이라는 평이 많지만, 조중동맹조약과 순망치한론을 베이스로 한 외교정책인 건 전임들과 마찬가지인지라 연평도 포격 도발 등 북한의 과격한 도발 때는 북한 편을 들었다. 물론, 만약 북한이 단순한 도발 정도를 넘어 전쟁을 일으킬 시도까지 했다면 북한 편을 안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시진핑 집권 이후 시진핑이 정치적으로 거대한 삽질을 지름으로써 이마저도 잊혀지는 추세다. 대충 대한민국에서의 인식을 일본총리로 비유하자면 시진핑은 아베 신조라고 치면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나 오부치 게이조 정도 되는 인물로 보아도 될듯하다.
- 대한민국의 중국 표준음 제도가 전면적으로 적용 된 첫 지도자이다. 모택동(마오쩌둥), 화궈펑 시기까지는 거의 대부분 한국한자음으로 표기되었고, 덩샤오핑, 장쩌민은 중국어 발음과 한국한자음 표기가 공존했다.
- 시진핑이 시다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것처럼 이쪽 역시 후꺼(胡哥 : 후 형님)라는 별명이 있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실 후진타오는 자신에 대한 호칭에 대해 시진핑마냥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진핑에 비해 자기 애칭이 그다지 유명해지지 않은 면도 있다.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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