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2. 개요
남아시아의 인도의 서쪽에 위치한 국가. 본래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였으나 인도와는 언어와 민족, 문화, 정서도 다른 지역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종교가 다른 탓에 결국 영국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면서 별개의 국가로 갈라졌다.
수도는 '이슬람의 도시'라는 의미의 이슬라마바드. 하지만 상업, 문화의 중심지이자 최대 도시는 항구도시인 카라치다.
그 밖에 주요 도시로 라호르, 라왈핀디 등이 있다.
인구는 2017년 인구조사에서 2억 770만 명을 돌파했다.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다.
인구 97% 이상이 무슬림으로,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무슬림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공용어는 우르두어와 영어이며 우르두어는 특별히 국어로도 지정되어 있다.
다만 우르두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의 비율은 8%에 불과하며, 펀자브어가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45%)을 차지한다.
1950년대 말 국가 예산의 65%를 국방비로 몰빵한 덕택에 다른 나라들보다 문맹 퇴치, 전기 보급, 정교분리 등이 수십 년이나 더 늦어졌다.
현재 파키스탄은 극심한 경제난과 갈수록 극단화되는 사회, 내전으로 막장인 치안 등으로 인해 답이 없을 정도로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그나마 그 유명한 인더스 강이 흐르는 비옥한 펀자브 평야에서 나오는 풍부한 농산물과 외국에 나가있는 파키스탄 노동자들의 송금액이 크니까 망정이지 이 두 가지가 아니면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이다.
미국 평화기금(Fund for Peace)에서 발표하는 실패국가지수 14위에 랭크되었던 바 있다.
그나마 2021년에는 29위를 기록했지만, 아직까지도 위험 단계다.
대량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지역 강국에 분류된 적도 있으나, 나라 꼴이 이렇다 보니 잠시 지역 강국 항목에서도 삭제되었다.
다.
3. 국호
다른 ~스탄 돌림자 나라들은 모두 민족명에서 딴 것인 데 반해 파키스탄이란 이름은 두문자 합성어이다.
파키스탄의 독립운동가 초우드리 라흐마트 알리가 옥스퍼드 대학 재학 중 고안한 낱말이다.
인도 서쪽에 무슬림이 다수 거주하는 인더스 강 유역 5개 지역 펀자브(Punjab),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서 글자를 따와 PAKSTAN을 만들고, 발음의 용이성을 위해 중간에 i를 추가한 것이다.
Pak(پاک)은 우르두어로 '신성한', '청정한'이란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페르시아어로 같은 뜻인 pāk(پاک)에서 온 차용어이다.
또한 stan(ستان)은 페르시아어로 땅을 뜻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Pakistan(پاکستان)이라고 하면 '정결한 땅', '신성한 나라', '청정 지대'라는 뜻도 된다.
'Pakistan'이라는 단어가 통째로 페르시아어 단어인 셈이다.
알리는 이것을 노리고 절묘하게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근대 이전의 페르시아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쓰이는 언어에는 유럽의 라틴어나 동아시아의 한문마냥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단어가 많다.
4. 국기
이슬람교 국가답게 흰색과 초록색 단 2가지의 색으로 되어 있으며, 초록 바탕에 하얀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있다.
깃대 왼쪽으로 하얀 수직띠가 있고, 그 옆으로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록색 바탕이 그려졌으며, 초록색 바탕에 커다란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다.
1947년에 인도와는 별도의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사실상 인도와는 다른 나라로 독립할 때 화가인 아메루딘 키드와이가 디자인하여 국기로 제정하였다.
또한 국기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진 모양은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과 서파키스탄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방글라데시가 분리 독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 국기를 사용하고 있다.
하양은 평화, 초록은 번영, 초승달은 발전, 별은 지식을 뜻하며 공통적으로는 이슬람의 상징을 뜻한다.
그 외 국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초록은 다수인 이슬람, 일부를 차지하는 하양은 이슬람 외의 소수자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5. 국가
국가는 قومی ترانہ(아랍 문자)/Qaumi Taranah(라틴 문자)이다.
이는 우르두어로 국가(노래)를 의미한다.
پاک سرزمین,(파크 사르자민: 신성한 땅)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르두어 가사만 있으며 영어 가사는 따로 없다.
발음만 다르지 중간에 한 번 나오는 کا를 제외하면 가사 전체가 페르시아어 차용어로만 이루어져 있어 페르시아어로 읽어도 완전히 같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파키스탄이 크리켓 인기가 높은 나라이다 보니 크리켓 경기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6. 역사
모헨조다로 유적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1947년에 인도와는 별개의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파키스탄 자치령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현대 이전의 역사는 북인도/아프간의 역사와 상당수 겹친다.
오히려 고대에 인도(Indos)라 하면 인도 아대륙이 아니라 인도스(인더스)강 유역, 곧 파키스탄 일대를 가리켰다.
인도/역사, 아프가니스탄/역사 참조. 국가 정체성 차원에서 무굴 제국 시대나, 고대 인더스 문명 등을 교육과정에서 많이 강조한다고 한다.
상고 인도의 역사가 시작된 인더스 강 유역 대부분이 현재는 파키스탄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인더스 문명이 왜 파키스탄 역사냐고 키배를 벌이는 중이다.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관계 문서 및 인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관계 문서 참조다.
7. 기원
인도와 파키스탄이 별개의 국가로 독립한데는 과거 무굴 제국의 지배층이던 무슬림 엘리트들이 인도 독립 이후 소수자로 전락하여 권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영국의 식민 지배 이전 인도에서는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 정복자들이 현지 힌두교 사회와 융화돼서 지내는 편이었는데, 이는 특별히 이들이 오늘날의 무슬림들보다 더 관용적이라서라기보다는 그 편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세부터 근세까지의 인도는 카스트 제도에 바탕을 준 정교하게 분업화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전성기 당시 무굴 제국의 경제는 전 세계 경제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전근대 기준으로는)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였다.
무굴 제국의 황제들은 힌두 브라흐민 지주들이 무슬림 소작농들이나 소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에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는 일조차 없었다.
오늘날의 무슬림 사회라면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무굴 제국 이외에도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국, 하이데라바드 니잠국 등등은 무슬림 통치자들이 현지인 힌두교도 토후들과 협력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도아대륙이 영국의 식민지로 예속되고, 영국인들이 19세기 초반 자국 내 면화 산업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다카와 마드라스 등지의 전통적인 인도 내 면방직 산업을 정책적으로 초토화시키면서 무슬림 엘리트층 입장에서 힌두 카스트 시스템을 실리적인 목적으로 용인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은 서서히 인도의 기득권을 차지하던 무슬림들의 권리를 축소시키고 인구 수가 더 많았던 힌두교도들의 편의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1875년 힌두교계에서 기독교 선교사들과 무슬림들의 부흥 운동에 영향을 받은 힌두교 부흥운동 아리야 사마지(Arya Samaj) 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영국 정부는 관청에서 페르시아 문자 대신 무슬림들이 읽지 못하는 데바나가리 문자를 사용하도록 지침을 변경하였다.
힌두교 신문, 잡지 발행부수가 급증하는 힌디어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사이드 아흐마드 칸을 비롯한 무슬림 지식인들은 인도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고립된 소수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고 우르두어의 현대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아흐마드 칸은 우르두어가 힌디어에 뒤쳐지지 않도록 서구 과학 기술 서적을 우르두어로 번역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벌였으며, 인도 각지에 대학에서 우르두어 강의도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1930년 인도의 유명한 우르두어 문학가이자 법학자였던 무함마드 이크발은 영국령 인도 제국 북서부의 무슬림 거주지역을 묶어서 무슬림만의 독립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여기에 무슬림 엘리트들이 동조하면서 별개의 자치령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원래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관료로 일하기 위해 영국과 독일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이크발은 법학보다는 문학과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귀국 이후 우르두어 문학 부흥에 투신하였다.
다만 법학을 완전 내팽개친 것은 아니라 법전 번역에도 관여하였다.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샤리아법이 아닌 서구 법을 따르는 이슬람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방향을 잡고 파키스탄 국체의 토대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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