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본명 : 리나 현 박 (Lena Hyun Park)
한국명 : 박정현 (朴正炫, Park Jeong Hyun)
출생 : 1976년 3월 23일 (46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 미국
신체 : 150cm, 39kg, O형
가족 : 아버지 Won-Sik Park, 어머니 Laurencia Hyang Park여동생 Uriah Grace Park, 남동생 Brian Han Park, 배우자(1969년생, 2017년 결혼 ~ 현재)
학력 : UCLA (연극영화과 / 중퇴)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과 / 학사)
데뷔 : 1998년 1집 앨범 《Piece》 (데뷔일로부터 D+8966일)
종교 : 개신교
취미 : 독서, 요리
소속사 : 본부엔터테인먼트
별명 : 국민요정
팬 커뮤니티 : (이쁜 정현 사랑) (리나스파크) (박정현 갤러리)
2. 개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90년대 후반 혜성처럼 가요계에 등장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현재까지 오랜 세월 꾸준히 활동 중이다.
주로 팝발라드, R&B 장르를 무기로 내세우지만, 포크, 모던록, 재즈, 신스팝 등의 다양한 분야에 강점을 가지고 있으며, 데뷔한지 25년 이상인 현재까지도 최신 트렌드에 맞는 다양하고 젊은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다.
3. 데뷔 전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성가대 활동을 했다.
자연스럽게 미국 본토의 가스펠과 CCM을 접할 수 있게 된 상황. 박정현 특유의 소울틱한 R&B 창법의 기틀은 이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89년 2월, 다우니 지역 장기자랑 대회인 <다우니 웨이 아우터 브로드 웨이 탤런트 콘테스트>에서 보컬 부분 대상을 탔다.
이후 교민들 사이에서 꾸준히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여러 콘테스트에서 상위 입상하고, 시카고나 뉴욕으로 원정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93년에는 CCM 앨범을 정식으로 취입하여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흔히 박정현 가스펠이라고 알려진 노래들이 바로 이 앨범 수록곡들. 참고로 이 앨범은 2001년에 국내에 발매되었다.
이미 가수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1994년,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UCLA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그렇게 2학년을 마친 뒤 1996년에 CCM 앨범을 프로듀스 해준 "P.S.I love you"의 작곡가 김덕윤(조셉 킴)에게 스카우트 되어, 혈혈단신으로 당시엔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땐 한국에서 가수로의 커리어를 쌓는것 보다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한국어도 배울겸 1년만 가수활동을 경험한 후 다시 돌아오겠다는 막연한 계획이었다고 한다.
교포 친구들을 만나도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은 본인과 본인의 형제들밖에 없어서 힘들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억양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편이다.
후술하겠지만 소속사 문제로 정식데뷔는 1998년에 하게되었지만, 방송 데뷔를 한 것은 1996년 열린음악회에서였다.
당시는 영어 본명 ‘리나’를 사용하고 있다.
평소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 가수 이선희에 대한 마음을 담아 데뷔 무대 첫 곡을 이선희의 대표곡인 'J에게'로 결정했다고 한다.
불후의 명곡 이선희 편에도 출연하여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을 열창하는 등 이선희에 대한 존경심을 표출하였다.
그런데 데뷔를 준비하던 기획사가 하필이면 IMF를 맞아 파산하는 바람에 데모 CD까지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1집 앨범 자체가 백지화되고 데뷔 일정이 무산되는 어려움을 맞게 된다.
박정현의 회상에 의하면, 이때 미국에 있는 남자친구와도 사이가 틀어지게 되고 한국말도 서툴고 생활비도 없어서 말도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1998년 데뷔까지 2년간은 가수지망생 박정현에게 큰 시련의 시간들이었는데, 미국에서 가져온 키보드 하나만 가지고 1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끊임없이 노래를 지으며 외로움을 달래야 했다고 한다.
이때 작곡한 노래 중 하나가 2집 수록곡 "Ordinary"이다.
가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 같은 사람이 과연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라는 자기 성찰의 내용. 들어보자. 2013년 안산 록밸리 페스티벌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직접 노래를 쓴 배경에 대해 영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당시 백지화되었던 1집 앨범은 '박정현 Forever' 라는 앨범 으로 재발매되어 빛을 보게 되었는데, 사실은 파산 이후 판권을 인수한 새 회사에서 가수 동의없이 멋대로 발매한 앨범이다.
거기다 아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말 그대로 데모 CD인지라, 발매하지 않을 계획이었던 곡이나 다소 미흡한 곡들도 몽땅 뭉뚱그려 발매한 앨범이라 팬들에게 욕을 한바가지 얻어먹었다.
아무튼 당시부터 노래 실력 하나는 절륜했던지라 데뷔 준비 시절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다.
이문세를 놀라게 했던 이야기 등...하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프리 상태에서 다행히도 윤종신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
데뷔 전 1997년 2월에 (1997.2.1 ~ 2.24 사이 주말공연으로 추정) 김장훈 만회 콘서트의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한국말을 거의 할 줄 몰라 종이에 써온 자신의 소개말 들을 읽으며 자신을 소개 했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 아직 발매하기 전의 '나의 하루'를 부르기도 했다.
1997년 3월에는 김민우의 4집 앨범 '후애'의 'December(32)'라는 트랙에 듀엣을 참여했다.
여담으로 이 곡의 작사가가 P.S. I Love You의 작사가인 하해룡 씨이다.
앨범작업을 같이 하며 이 앨범에도 참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4. 1998년~ 2002년 첫 번째 전성기 <꿈에>
이윽고 1998년 2월 1일, 기존 앨범의 타이틀곡이 될 예정이었던 '첫 눈'을 다시 만든 'P.S. I Love You'를 수록한 1집 'Piece'를 정식 발표하면서 데뷔하게 되었으며, 윤종신이 프로듀스한 타이틀곡 '나의 하루'가 라디오 등을 통해 흐르면서 인지도를 급격히 높이게 된다.
후속곡 'P.S. I Love You' 역시 히트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수로 입지를 굳혀갔다.
보정 하나 없던 당시 음향으로도 어마어마한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1999년 3월 3일 2집 'A Second Helping'을 발매하였다.
타이틀 곡은 '몽중인'인데 생각보다 후속곡인 '편지할게요'를 타이틀 곡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결정적으로 뮤직 비다오가 ‘몽중인’에만 존재한다.
실제로 어두운 분위기의 '몽중인'보다 '편지할게요'가 더 인기가 많기는 해서, 가요 프로그램에서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0년 10월 28일 3집 'Naturally'를 발매하였다.
타이틀 곡은 'You Mean Everything To Me'. 원래는 유희열이 작곡한 '아무말도, 아무것도'가 타이틀곡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러닝타임이 6분에 이르는 관계로 교체되었다.
음악 프로에서는 한동안 1등을 하지 못했다가 드디어 2002년 6월 15일 발매한 정석원이 프로듀싱한 4집 Op.4의 타이틀 곡 "꿈에"가 대박을 치면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다.
(2002년 8월 17일 MBC 음악캠프)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점에 YB가 부른 응원가 때문에 약간 묻혀버린 감도 있긴 했다.
월드컵 분위기가 한참 달아오를 때라 길거리에 흘러 나온 곡이 하필 그 가수의 곡밖에 없었다.
그래도 쟁쟁한 가수들을 뚫고 1위를 차지한 만큼 본인에겐 제1의 전성기라고 할 만한 시기이다.
이 당시는 음원차트 순위나 스트리밍이라는 개념조차 없던때라서 TV 음악 프로의 순위가 곧 실제 인기 순위였다.
이것은 현재까지 그녀가 TV 음악 프로에서의 받은 최고의 성적이다.
물론 차트 1위곡이 이것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꿈에’ 이후에 일본을 위주로 활동했으며,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했을 때는 아이돌 음악이나 미디움템포 발라드가 주류가 된 터라, 그녀의 주력장르인 팝발라드나 R&B가 발붙일 곳이 없어진 것도 있었다.
실제로 박정현도 이런 흐름에 맞추어 7집에서 미디움템포 발라드를 선보이기도 했다.
특이하게 4집 활동 당시 Opus Project라는 컨셉하에 1악장부터 4악장까지 4번의 콘서트를 했다.
이 아이디어는 그 프로젝트는 4집의 앨범명이였던 Op.4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콘서트의 주제가 각각 1악장 Live Storm, 2악장 Adagio, 3악장 Finale 그리고 라이브 앨범이 발매된 후 가진 발매 기념 콘서트 4악장 The Album 콘서트가 그것이다.
Live Storm은 클래식의 1악장과 마찬가지로 메인 주제가 나오는 공연 스타일로 평소처럼 신나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강렬한 라이브를, Adagio는 2악장이 슬프고 느린 주제인 만큼 조용하고 어쿠스틱한 편곡을 선보였다.
3장 Finale는 그 주제대로 1악장과 2악장에서 선보였던 음악 패턴을 이 공연에서 들을 수 있으면서도 색다르고 화려하게 꾸민 공연을 했다.
이를 위해서 일본에서 브라스 뮤지션들을 섭외했다고 한다.
2002년 브라운 아이즈와 함께 월드컵 대표 가수로도 참여했다.
브라운 아이즈와 일본의 CHEMISTRY, Sowelu와 함께 'Let's get together now' 를 불렀고 2002 월드컵 오피셜 로컬 앨범에 'Let's get together now' 와 함께 하림이 작곡한 'Glorious' 가 수록되었다.
후에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이때 자신이 처음으로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고 한다.
당시에 활동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서 복학을 하려다가 이 제안을 듣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미 등록금을 낸 상태였고 환불은 못 받았다고 한다.
5. 일본진출
4집의 성공 이후 'Let's get together now' 등으로 일본에서 이름을 알린 후 러브콜을 받아 일본에도 진출했다.
곤조의 애니메이션 로미오X줄리엣의 오프닝 'You Raise Me Up' 을 부르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애니메이션의 영향 탓인지 박정현이 부른 'You Raise Me Up' 은 세계적으로도 은근히 유명한 편. 유투브에서도 총 수백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호평을 받고 있다.
모종의 이유로 삭제되는 영상이 꽤 있어서 실제로는 더 많은 조회 수를 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음반은 꾸준히 발표해서 총 3장이나 되는 정규앨범을 발표하였다.
사실 일본 음악 시장의 특성상 레이블의 힘이 중요한데, 소속사 푸쉬를 그다지 크게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본 3집 앨범 "Cosmorama" 의 수록곡인 "Gold" 와 "Music" 이 마이니치 방송과 TBS테레비의 프로그램 엔딩 테마로 "The Gold Within" 이 영화 "LOVEHOTELS" 의 테마송으로 그리고 싱글 'Jealousy' 의 "愛のジェラシー" 가 SK-II 에어터치 파운데이션의 CM송으로 사용되는 등 성과도 괜찮았다.
그리고 9월 30일에 가진 롯데면세점 패밀리 콘서트에서 일본 활동 당시 부른 'Gold' 라는 곡을 번안한 그 바보를 소개하면서 짤막하게 일본어로 소개했다.
"이 노래가 원래 일본에서는 원래 제목은 ゴルドと言う曲です(Gold라는 곡입니다)."3장의 정규앨범 외에도 여러 싱글컷을 발표했고, 타 가수 앨범에 참여하는 등 음악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일본 R&B뮤지션 CHEMISTRY 의 앨범에 듀엣곡을 실었으며, 일본 힙합 DJ JHETT의 앨범에 객원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Voice of Love라는 일명 '일본판 위아더워드'에 당당히 한국가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일본활동 당시에도 '한국에서 온 괴물같은 가수' 정도로 인식되었던 모양.일화로는 박정현이 일본 활동 당시 노래 부를 때 관객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좌절하고 있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 팬들이 찾아와서 감동받았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SNS등지에서 간간히 팬으로 활동하는 일본인 팬들이 있다.
한편 일본에 진출하며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 "영어와 한국어와 일본어가 머릿속에서 섞여 너무 힘들다"고 진지하게 고백했던 적도 있었다.
당시의 그녀는 한국어도 완벽하게 구사하기는 다소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다.
6. 복귀와 음악적인 성장
이후 대한민국으로 리턴하여 2005년 2월에 5집과, 2007년 11월에 6집을 차례로 발매하였다.
5집의 타이틀 곡 '달'은 기존의 꿈에와 비슷한 오리엔탈 발라드였기 때문에 꿈에 만큼은 아닐지라도 꽤 인기를 끌었다.
6집도 발매 후 실시간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하는 등, 성적 자체는 준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이돌 시대가 시작되었고, 90년대에 비해 음반시장이 대폭 축소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2002년 만큼의 대국민적 인기를 얻는 폭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한편 이때부터 박정현의 싱어송라이터적인 면모가 십분 발휘 되는데, 특히 6집은 프로듀싱은 물론, 2곡을 제외한 모든 곡을 박정현이 직접 작곡하거나 참여했고, 4곡을 작사한 앨범으로, 특히 팬들 사이에서는 굉장한 명반으로 평가 받는다.
5집 또한 자작곡들과 참여곡들이 비중있게 수록되어 있고 편곡에도 참여했으며, 프로듀싱도 직접 하여서 매우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명반이다.
하지만 음악적인 진일보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떨어지는 대중성, 콘서트 위주의 활동방향, 그리고 학업까지 병행하게 되면서 대중들에 대한 노출 빈도는 매우 하락했다.
결국 TV 출연이 심야 음악 프로 정도로만 축소되면서 다소 '꿈에' 때에 비해서 인지도에서 손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가수이니 만큼 콘서트와 음악 프로 위주로 활동하는 것 자체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만, 인지도 부분을 고려한다면 다소 아쉽다.
7. 2009년~2010년
2009년 2월 26일 7집 '10 Ways To Say I Love You'를 발매햐였다.
이 앨범에서 박정현의 색이 가장 크게 달라졌는데, 대중성을 신경쓴 미디움템포 발라드를 타이틀과 후속곡으로 각각 세웠다.
후속곡 '눈물이 주룩주룩'은 음악 프로에서도 10위안에 드는 등 나름 선방하였다.
2009년 방영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에서 대구지역 심사위원을 맡았다.
이어서 2010년에도 미국 LA지역 예선 심사를 타이거JK, 윤미래와 함께 맡았다.
물론 후술할 졸업 이후의 일이다.
7집을 발표한 후, 학업을 마치기 위해 금방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2010년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졸업하면서 파이베타카파에 가입 하였고, 마그나 쿰 라우데(상위 15% 이상 우수졸업)을 수상하였다.
졸업식에서 미국 국가인 'Star Spangled Banner'를 불렀다.
미국 대학 졸업식에서 국가를 부르는 것은 아주 명예로운 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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