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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핫한 소식, 이병철에 대한 모든 것 (배우,가계도,사망,혼외자식)

by 채은아빠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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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필

출생 :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 #
사망 : 1987년 11월 19일 (향년 77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본관 : 경주 이씨 (慶州 李氏)
경력 : 삼성그룹 창업주 겸 초대 회장 (1938~1966)삼성그룹 초대 회장 복직 (1968~1987)
부모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형제자매2남 2녀 중 차남배우자박두을자녀슬하 4남 6녀장녀 이인희장남 이맹희차남 이창희차녀 이숙희삼녀 이순희사녀 이덕희삼남 이건희오녀 이명희사남 이태휘육녀 이혜자신체167cm, 60kg, AB형학력지수공립보통학교 (전학)경성수송공립보통학교 (졸업)중동학교 (졸업 / 26회)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 중퇴)병역해당사항 없음종교유교 → 불교 → 원불교 : 부모 : 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차남 : 배우자 : 박두을 : 자녀 : 슬하 4남 6녀장녀 이인희장남 이맹희차남 이창희차녀 이숙희삼녀 이순희사녀 이덕희삼남 이건희오녀 이명희사남 이태휘육녀 이혜자 : 신체 : 167cm, 60kg, AB형 : 학력 : 지수공립보통학교 (전학)경성수송공립보통학교 (졸업)중동학교 (졸업 / 26회)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 중퇴) : 병역 : 해당사항 없음 : 종교 : 유교 → 불교 → 원불교
부모 : 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차남
배우자 : 박두을
자녀 : 슬하 4남 6녀장녀 이인희장남 이맹희차남 이창희차녀 이숙희삼녀 이순희사녀 이덕희삼남 이건희오녀 이명희사남 이태휘육녀 이혜자
신체 : 167cm, 60kg, AB형
학력 : 지수공립보통학교 (전학)경성수송공립보통학교 (졸업)중동학교 (졸업 / 26회)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 중퇴)
병역 : 해당사항 없음
종교 : 유교 → 불교 → 원불교

2.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성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이다.
전자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양대 주역. 다른 한 명은 아들 이건희로, 아들 이건희가 이병철이 시작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부흥시켜 오늘날의 삼성을 일구었다.
지금의 삼성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이 모두 이병철로부터 비롯되어 소위 '범삼성가'라 불리며 현재도 대한민국 재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성전자만 해도 본사 직원만 113,965명에 기타 법인에 포함된 파견직, 협력사, 자회사를 통한 간접고용 인원을 전부 포함하면 47만 명이다.
정규직만 30만에 달할 정도. 이는 시총 1위인 애플의 정규직 직원 14만 명 보다도 2배 이상 많은 수치다.
전국의 자영업자를 다 합쳐도 657만 명 정도인 걸 감안하면 실로 엄청나다.
지금은 기업 규모가 작아졌지만 제지업계 최대 규모 기업인 한솔그룹까지 포함된다.
이외에도 차남 이창희의 고명딸 이혜진이 이끄는 래딕스글로비즈 및 래딕스플렉스와 그녀의 남편 조명희가 이끄는 디엠퓨어텍, 3녀 이순희의 아들인 김상용이 이끄는 알머스(前 영보엔지니어링), 혼맥인 중앙그룹(JTBC) 등도 범삼성가에 속하며 이들도 삼성 등과 상부상조한다.

3. 생애

경주 이씨 판전공파의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할아버지 때 만석꾼의 집안이 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2년 3월 지수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해 그해 9월 경성부 수송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였으며, 1929년 서울 종로의 중동학교를 26회로 졸업하고 이어 1930년 4월 와세다대학 부속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으나, 일본 유학 생활 중 건강 악화로 1934년 중퇴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상경해 2년간 그저 부친의 송금을 받으며 지냈다.
하릴없이 낙향해서도 집안일은 부친과 형이 했고 본인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직접 일본에서 상업 작물 종자를 들여오고, 개량돈(豚)과 씨앗닭도 들여왔으나, 취미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웃 친구들과 골패(도박의 일종)에 빠졌다.
한밤중까지 도박이 계속되어 늘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다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된 26세의 그에게 전환기가 찾아온다.
방문을 열고 달빛에 비친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을 받았다고 한다.
허송세월을 자책하고 밤새 독립운동을 할까, 일본 공무원이 될까, 사업을 할까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봤다고 한다.
결국 사업으로 정한다.
먼 훗날 인터뷰에서 이 때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삼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칩시다.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습니다.

이후 부친에게 지원받은 쌀 300석분의 토지를 기반으로 사업을 일으켜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작으로 운수업에도 진출하였으며,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 조홍제, 허정구 등과 함께 지금의 삼성그룹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삼성상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삼성을 일으킨 것이 제분업과 제면업으로 유명한 별표국수가 대구에서 이름을 날리며 자리를 잡는다.
이후 건어물 과일 유통 무역으로 진출하여 크게 성장하게 된다.
1942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하였다.
초기에는 부동산 투기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지며 사업이 몰락하고 부동산 투기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부동산 외의 사업은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었고, 경제적 흐름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짐작하는 대국적 안목과 수완으로 재기하기에 이른다.
광복 이후 6.25 전쟁이 벌어지자, 초기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서울에 있었으나,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90일간 북한군을 피해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때 전시 체제로 점령 지역 시민들의 살림살이를 징발하는 북한을 보며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삼성물산처럼 물자를 쌓아둔 창고가 있는 경우는 아무래도 더 손해를 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운전기사 위대식의 헌신으로 서울을 간신히 탈출하였으며,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의 종잣돈으로 1951년 부산광역시에서 삼성물산을 설립, 전쟁으로 사방에 널리게 된 고철을 수집한다.
그리고 이 고철을 2차 대전의 물자징발 여파로 쇠가 부족했던 일본에 팔고, 다시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 사업 6개월 만에 삼성물산은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올렸으며 1년 뒤에는 무려 60억 원의 재산을 쌓으면서 단숨에 재기에 성공한다.
고철 수집 사업을 시작할 무렵, 전쟁 전에 중국에 수출한 면실박(棉實粕, 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깻묵) 대금 3만 달러가 도착해 다시 든든한 자본금을 갖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호재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던 구리 탄피들을 긁어모아 이를 재수출하는 사업까지 하면서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삼성물산에서 모은 자금으로 1953년에는 제일제당(CJ그룹의 전신),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그룹 규모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손님에게 설탕을 탄 물을 대접할만큼, 시장에서 고급 기호품으로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 설탕 값을 낮추는 데 기여했으며, 양복 사업은 품질관리 부족+이미 시장을 선점한 외국 제품의 영향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1957년 정부의 모직물 수입 금지 조치 수혜 등을 입으며 국내 시장에서 성장하게 된다.
1940~1950년대에 갖은 시행착오를 거쳐오다 50년대 후반부터 뒤늦게 성장가도에 오른 현대그룹의 정주영과 달리, 상술했듯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이승만 정권 시기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선친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는데, 이병철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또 당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한 해 비료 양은 40만 톤이었지만, 충주와 나주에서 생산되는 비료는 6만 톤에 불과해 당시 정부로부터 달러 지원을 약속받으며 비료 공장 설립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비료 공장 설립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검찰에 연행되어 벌금 50억을 내며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다.
당시 쿠데타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한 보여주기식으로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는데, 재계 1위 기업의 이병철은 당연히 '부정축재자 1호'로 불렸다.
군사정권은 이병철 등을 부패 혐의로 몰았으나 경제 운용과 성장을 위해 이들과 타협하였고, 이병철도 "전시세금이(1,000환을 벌면, 1,200환을 세금으로) 지금도 유지되는 상황"을 설명하며, "사업 투자로 나라에 기여하게 해달라"고 요구, 군사정권과 주고 받는 형태의 거래적 협력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비료 공장 설립도 재개하였다.
다만 지방의 명망있는 양반가 출신으로 유교적인 소양을 중시했던 이병철은, 초창기까지만 해도 反기득권적 성향이 강했던 박정희와 사이가 그다지 좋진 않았다고 한다.
화폐개혁 당시 일화도 있고 해서 이를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에 가까웠다고 평하는 이도 있다.
하여튼 10년의 곡절 끝에 울산에 백만평 부지를 매입해 비료 공장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연 36만 톤 생산이 가능한 사업장으로 완공된 즈음 삼성에 또 한번의 시련이 닥친다.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 것. 이 일로 국민적 공분이 일자, 이병철은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자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한국비료공장(현 롯데정밀화학)과 경주 최씨 가문에게 기증 받은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를 정부에 넘기게 된다.
그렇게 한동안 삼성그룹 경영은 장남 이맹희가 이끌게 되지만, 1968년 다시 복귀한다.
그리고 이때 밉보였는지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막내아들(삼남)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차기 수장으로 지명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정권에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사를 받고 대중에 일방적으로 비난받는 일을 겪은 후, 정계에 진출하려는 뜻을 품고 몇몇 명망 있는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고 한다.
대신 그에 대한 대안 확보의 차원에서 언론사를 설립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TBC 동양방송(1964년)과 중앙일보(1965년)다.
중앙일보는 현재까지 남아있지만 TBC는 1980년 전두환이 등장하면서 KBS로 통폐합돼 KBS 2TV, KBS 2FM 등으로 전환된다.
신군부에 의해 동양방송이 강제적으로 통폐합되었을 때 당시 방송계에선 이 회장이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은 한국비료 헌납 때도, 언론통폐합 때도 기복(起伏)을 드러내지 않고 다음날 출근해 집무실에서 일을 봤다고 한다.
다만 언론통폐합 땐 이미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을 때라 신빙성에 의문이 가는 회고긴 하다.
하여튼 그 와중에도 다른 사업으로의 진출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한일은행·한국상업은행·조흥은행 등과 안국화재·동방생명 등을 인수하였고,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대한암협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하였다.
삼성장학회를 설립하고 대구대학 및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삼성전자·삼성전기 등을 통해 첨단 전자통신 및 반도체 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4. 삼성전자 설립과 반도체 산업 진출

이병철이 1968년 중앙일보를 통해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큰 반발에 부딪혔다.
기존 전자업계는 물론이고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업허가가 난관에 부딪히자 이병철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만나 전자산업은 장래성이 있는 사업이며 국가적 사업이 되어야한다고 설득하였고 박정희는 전자산업에 대한 개방 조치를 하여 삼성이 전자산업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그리하여 1969년 1월 13일 현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전자공업'이 설립되었다.
삼성전자 신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인 윤종용 전 부회장 등이 이 때의 창립멤버다.
이 초창기 때만해도 삼성전자는 국내에서도 금성전자(현 LG전자)에 밀리는 2등 신세였다.
1970년대에 삼성전자가 수원에 새 공장을 지을 때 43만평 규모로 지으려고 했는데 이 때 임원들이 회사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고 반대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말하며 43만평을 고집했다.
일본 히타치 공장이 40만 평인데, 그것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사업을 했으면 언제고 일본 기업을 이겨야 될 거 아니가? 그러니 저기보다 3만 평이라도 더 커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이가? 안 그렇나? 어디 내 말이 틀렸나?
1982년 암 수술의 고비를 넘기고 만 72세 노구의 몸으로 이병철은 보스턴 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 수여식을 위해 미국에 방문했는데 이 때 세계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이병철은 이 때에 대해 미국이 설계한 생산설비를 도입한 일본이 자동차, 반도체 등의 미국시장을 거꾸로 침식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이 위기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기이한 현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2년 전인 1980년에 일본의 후지(富土) 화학 회장 이나바 슈조(稻葉秀三)와의 대담 중 나온 발언을 떠올리며 세계 최강 미국도 흔들리는 판에 삼성도 새로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반도체 사업을 추진했다.
사실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라 1974년 이병철의 3남 이건희가 반도체 산업 진출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 위기를 맞자, 이병철이 삼성전자로 하여금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회생시키는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당시 삼성반도체는 말만 반도체 회사였지 트랜지스터 생산이나 겨우 하는 기술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이병철은 삼성반도체 회생 과정에서 NEC에 자문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기술협력 요청마저 NEC가 거절하자 대체 반도체가 뭐길래 NEC가 이렇게 나오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여러 반도체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며 정보를 입수해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측해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 일본 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에서, 세계 1등 수준이 되어야 승부를 걸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든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도박과 다름없었다.
1983년 3월 이병철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고 기술진 확보를 위해 미국에 있던 유학파들을 대거 스카우트하였다.
원래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기로 했었으나 실제로 마이크론에 가보니 마이크론측의 태도는 매우 적대적이었고 단 2명만이 마이크론 사내에 들어 갈 수 있었고 나머지는 출입도 못했다.
들어간 2명마저도 제대로된 연수는 커녕 질문도 받지 않았으며 정해진 시설을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기초적인 D램 기술 자료를 받은 것 정도가 전부였다.
결국 삼성은 자체 개발하기로 방향을 틀었고 연구진들이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각오로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불과 1년도 안되어 1983년 11월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세계 3번째 개발이었다.
삼성이 이렇게 단기간에 해낼 것이라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당시 세계 반도체 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개발한 64K D램은 국가등록문화재로도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84년 10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가 당시 삼성 반도체에서 겨우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 가격을 기존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기업들이 덤핑 공세에 나서며 가격이 30센트로 폭락한 것. 이에 삼성이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면서 1984년 한 해에만 1,300억 원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
"고 수차례 건의하였으나, 이병철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 말하며 꿋꿋이 밀어붙였다.
64K D램 가격이 폭락했지만, 다른 1,000여종의 반도체는 이익이 나는 만큼, 앓는 얘기를 자제하고 계속 공장의 생산라인 증설에 나서며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것이다.
1984년 10월, 악몽의 덤핑 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업계에서 기적이라 부른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1986년에는 1Mb D램을 출시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비록 개발 전후에 적자를 보더라도, 확고한 기술력과 관리 능력이 갖춰진 이상,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 특히 256K D램 제품은 시장 출시 1년 만에 세계 D램 시장의 1/10을 점유, 64K D램으로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삼성전자는 시장에서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이후 이건희 대에 이르러선 미국, 일본의 선두주자들을 차례로 추월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1986년 1Mb D램 개발에 성공했지만 1Mb짜리를 최초로 개발했던 도시바와는 2년의 기술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1987년에 한 언론에서 "우리나라 반도체는 일본 것을 베꼈다"는 식의 보도가 나왔고 이를 본 이병철은 분노하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가서 진대제에게 "우리가 일본 것 베꼈다는 게 사실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라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 하라고 시작한 거 아이가?"()라고 말했다.
이에 진대제는 반드시 16Mb D램을 독자 개발해서 다시는 모방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삼성전자는 1989년에 16Mb D램을 1위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1개월까지 줄이며 세계 2번째로 개발하고,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로 256Mb, 1Gb D램을 모두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5. 다른 사업들 그리고 사망

1974년에 울산에 삼성석유화학을 설립했고 1977년에는 조선소를 인수하여 조선업(현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방위산업에도 진출하여 삼성정밀(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을 설립했다.
GE와의 기술제휴로 소위 제공호라고도 불리는 최초의 국산 제트전투기인 KF-5를 생산한 것이 삼성정밀이다.
생전에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해 10년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1987년 11월 19일 저녁 5시 5분,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77세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암 발견 초기부터 관련 질병 자료를 다방면으로 수집해 치료에 활용하며 관리한 덕분인지 투병 중에도 반도체 산업 진출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사후 이태원동 자택에 빈소가 차려져 민정당 총재 노태우와 국회의장 이재형, 전 신민당 총재 이민우, 코오롱그룹 회장 이동찬 등 각계 인사들이 조문했으며,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11월 23일 호암아트홀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시신은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부지에 안장되었는데, 본인 의지와 달리 묘 위치가 삼성물산 구역으로 되어있다 보니 후손들의 배임 논란이 있다.
여담으로 폐암은 유전될 수 있는데, 맏아들 이맹희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삼남 이건희 역시 폐질환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또 이병철의 대를 잇는 범 삼성가에는 일반인보다 약한 폐와 샤르코-마리-투스 병이 유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건희는 삼성의료원에 입원 전까지 겨울에는 주로 하와이 별장으로 떠났으며, 이재용 집의 공기 상태는 하와이 별장에 준할 만큼 맑게 해놓는다는 소문도 있다.

6. 사업 철학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사업보국의 신념을 가졌다.
자신의 이러한 경영이념을 집대성한 호암자전에서는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언급했다.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은 무조건 지키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케줄을 무조건 지켜 이병철이 출근해 결재를 하다 펜을 딱 놓는 시간은 오후 12시 30분 점심식사 시간이었다고. 딱히 정해진 출근 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심지어 귀빈들 맞는 영빈관 격인 승지원이나 자택에서 일을 보기도 한 아들 이건희와는 다른 부분.호암자전에서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며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노동조합을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에 이상적인 삼성의 무노조 원칙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참고로 현대그룹의 정주영도 노동조합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 당시 경제인 중 대부분은 노조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 노조 자체가 모든 임직원들에게 피해를 끼쳐 회사를 패망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노조를 강력히 금지시켰다.
삼성은 무노조 원칙을 지켜오다가 손자인 이재용 대에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포기하고 노조 설립을 허용하면서 사라졌다.

7. 인재 관리

"조직이 사람을 움직이는 기업은 망하지만,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은 발전한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 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5%는 탈락하고 30%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65%의 사람이다.
반 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국가의 발전이 유능한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면 기업의 발전은 유능한 경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은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60년이 걸렸습니다.

"의심이 가거든 사람을 고용하지 마라.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사람을 채용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 그리고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다.
생전의 이병철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
1년의 계(計)는 곡물을 심는 데 있고, 10년의 계는 나무를 심는데 있으며, 100년의 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
"고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 이렇게 눈여겨 봐뒀다가 일을 맡긴 사람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6.25 전쟁으로 생명의 위기를 겪었지만, 충직한 운전사 위대식의 도움으로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를 구해 가족들과 서울 삼성물산공사의 임직원들이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고, 서울의 사업 기반이 한 순간에 북한군에게 몰수되어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대구의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를 건실하게 경영한 이창업이 건넨 3억 원으로 재기할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일모직 공장을 지을 때는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에 읽고 충격을 받은 <여공애사(女工哀事)>의 영향으로 사원들의 기숙사를 짓는 데도 공을 들였으며,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 사원들이 오갈 데가 없어지자, 원하는 계열사로 이직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1954년 제일모직 공장을 대구에 세울 때 공장보다도 기숙사를 먼저 세웠는데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숙사였으며 방에는 스팀 난방이 들어오고 목욕탕, 세탁실, 다리미실, 미용실 등이 있는 등 당대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설이었다.
1957년 이곳에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에는 호텔에서나 볼 수 있던 수세식 화장실을 둘러보며 "화장실을 보면 굳이 다른 곳을 볼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1961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또한 "이 정도면 딸을 맡길 수 있겠다"고 말했다.
급여 또한 좋아서 당시 제일모직 근로자의 증언에 따르면 월급으로 동생들의 학비와 다섯 식구 생활비까지 충당 가능했다고 한다.
1965년에는 5.16 군사정변 직후 처형당할 뻔한 홍진기를 포섭해 중앙일보를 창간, 일찌감치 자사에 우호적인 언론을 만드는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고용된 사장이지만, 전직 국무위원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홍진기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으며, 나중에는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회장이 O를 친 사람은 반드시 채용, < > 표시를 하면 면접 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사람(이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 X표는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는 후문이다.
지원자의 신발이 더러운 것을 보고 면접장에서 쫓아냈다는 말도 있다.
또 카더라에 따르면 관상을 봤는지 회장 옆에 일본의 골상학(骨相學) 전문가나 국내 유명 관상가가 동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하며 선우용녀가 먼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1960년대 이병철이 소유한 TBC 방송국 전속 무용수 시험에서도 이병철이 관상가를 데리고 와 직접 면접을 봤다고 한다.
방송국 직원 면접에서도 회장이 직접 와서 그랬을 정도면 다른 회사 면접은 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 관상가와 이병철이 면접을 다 봤을 거라고 확신할 수 밖에 없다.
이병철의 인사방침은 지역주의, 온정주의가 배제된 철저한 능력주의였으며, 경영실적이 나쁜 사장은 가차없이 인사 조치되었다.
생전에 실제로 발언한 인재관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그릇의 크기만큼 일한다.
사장은 사장의 그릇이 있으며, 상무는 상무의 그릇이 있다.
사장의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을 사장에 앉혔을 경우에는 그 사람도 죽고 그 직책도 죽는다.
즉, 결국은 실적 + 사람 됨됨이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어느 기업이든 최고경영자를 잘 두어야 기업이 잘 굴러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는 가급적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을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에 무척 신경썼다고 한다.
그 요건이란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망(信望)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Q : 이 회장은 경영철학에서 인재 육성이 중요과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A : 지금 삼성그룹은 10만 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교육을 중요시하도록 하기 위해 의무라든가 사람 됨됨이를 입사 때부터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룹 내에는 4개의 사원연수소를 갖추고 그중에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연수원도 마련돼 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은 기초일 뿐이고, 입사 후 교육을 통해 성장케 한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984년 5월 22일자 일본 경제전문지 <<재계>>의 창간 30주년 특집호에서, 이병철과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 당시 상황을 대담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사람 욕심이 많아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라고 말할 정도로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진대제, 이윤우를 비롯해 이임성(샤프전자 고문), 이상준(미국 자일록 기술개발 책임자), 이일복(전 인텔 근무), 이종길(미국 인터실, 사이너텍 CMOS 제조수율 개선 기술자), 박용의(미 웨스턴디지털, 인텔 메모리 설계 기술자)로 대표되는 박사급 인재들을 데려왔고, 초창기 미국에서 생활하듯 청바지 차림으로 첫 출근을 한 황창규를 용인하며, 그를 나무라려 하는 임원을 말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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