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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슈가 되는 삼성에 대한 모든 것 (전자,카드,언팩,화재)

by 채은아빠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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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필

국가 : 대한민국 (다국적 기업)
창립일 : 1938년 3월 1일 (84주년)
창업주 : 이병철
총수 : 이재용
본사 :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삼성로 129
규모 : 대기업
유형 : 복합기업, 다국적 기업
종업원수 : 267,305명(2021년 기준)#
매출 : 378조 7,400억원(2021년 기준)#
영업이익 : 42조 5,513억원(2021년 기준)#
시가총액 : 603조 6,338억원(2022년 3월 20일 기준)
공정자산 총액 : 483조 9,188억원(2022년 기준)

2. 개요

삼성(SAMSUNG)은 대한민국의 최대 규모 다국적 기업이다.
2021년 기준 자본총액 기준 재계서열 1위로, 그외의 시가총액 등 기업 평가 요소의 모든 영역에서 2위 그룹과 압도적 격차를 보인다.
단순히 기업의 규모를 제외하고서도,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룹이다.
창업주는 호암 이병철로 1938년에 창업한 삼성상회(三星商會)가 모태다.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 69번지 일대며 현재는 그 일대에는 '크레텍책임'이라는 기계공구 및 산업용품 사업장이 있다.
옛 삼성상회 건물은 1997년 노후화로 인해 철거되고 대신 그 자리에는 높이 5.95m, 너비 8.7m의 삼성상회 재현 벽과 삼성상회 실물을 250분의 1로 축소한 청동 모형으로 구성된 작은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리고 북구 침산동 옛 제일모직 자리에 들어선 대구삼성창조경제단지에 삼성상회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이병철이 당시에 살았던 집은 현재 북성로 오토바이 골목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
관련 기사대한민국의 기업으로선, 전무후무한 세계구급 성공을 거둔 삼성전자가 그룹의 메인이며, 삼성물산이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한다.
과거 재벌의 필수요소 중 하나인 순환출자 구조를 가졌으나, 2018년 이후론 삼성의 순환출자 구도는 전부 해소되었다.
현재는 오너 일가가 삼성물산을 지배하고, 삼성물산이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와 삼성의 금융 계열사를 지배하고 삼성전자가 기타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이다.
삼성그룹 사업체는 무조건 우리은행만을 유일한 거래처 은행으로 취급한다.
그룹 전체가 하나의 은행만을 취급하는 건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인데, 삼성은 이걸 진짜로 한다(!). 우리은행의 외환 실력을 쌓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하는 중. 우리은행의 외국 지사 역시 삼성그룹 현지법인의 주거래은행이다.
원래 삼성은 한일은행이 1958년 불하과정을 통해 초기 민영화될 때 한일은행을 소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일은행에 모든 거래처를 몰빵하고 유지한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중이다.
우리은행의 한국 제외 외국 파견지점을 보면 죄다 삼성그룹의 외국지사가 있는 도시에 같이 파견한다.
2017년 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삼성그룹은 그룹의 경영을 총괄하던 미래전략실의 해체 계획을 발표했다.
미래전략실은 삼성의 계열사(관계사)들을 수직적 지배하는 조직으로서, 미래전략실의 해체는 삼성그룹의 해체를 의미한다.
한편 삼성그룹은 미래전략실 해체 후엔 계열사들이 각자 자율적으로 경영하는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그룹 공채도 2017년을 끝으로 없어지고, 계열사별로 독자적으로 채용하는 체제로 바뀐다고 하였다.
기사 결국 2017년 4월 3일에는 삼성그룹 공식 홈페이지와 블로그가 문을 닫았다.
이보다 앞선 2017년 3월 2일에는 그룹 사내 방송이 종료되었고, 3월 3일에는 그룹 기자실이 폐쇄됐다.
기사다만, 삼성 관계사간의 지분관계는 여전하기 때문에 그룹이 해체한 것은 아니다.
삼성은 여전히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발표하는 기업집단이며, 그룹 총수 이재용이 실질 지배력을 행사한다.

3. 역사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8년 3월, 협동정미소 주인이던 이병철이 대구부 수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삼성상회(三星商會)를 개업한 게 본 그룹의 시초이다.
당시 29세의 이병철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농지 투기에 실패한 후 심기일전을 굳히며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상회를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농산물 판매와 별표 국수 판매 등 가볍고 기본적인 것으로 훗날의 삼성그룹 형태와 비교하면 차이가 현격히 나는 편이다.
요즘에는 삼성이 일류 재벌 집단이라고 한다지만 초창기까지는 서민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던 곳. 전 CJ그룹 명예회장이자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삼성상회는 지금의 삼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며 국수 공장이 매출은 늘었지만 정작 이병철 본인은 그 돈을 모두 공장 설비 투자에 쏟았고 이병철 일가 역시 공장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잤을 정도로 공장 상태가 열악하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삼성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최악의 환경이었으며 가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당시 별표 국수가 많이 팔려 매출액도 올라갔지만 대구에는 경북에서 1위를 차지하는 소표 국수가 있었고, 2위의 풍국면도 있었다.
풍국면은 지금도 대구광역시 북구 만평네거리 북쪽 근처에 공장이 있으며 현재는 범 삼성가인 신세계그룹의 국수 OEM 회사다.
결국 별표 국수는 이들의 아성과 도전을 이기지 못해 폐업했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해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한 후 1948년 서울 종로2가에서 조홍제와 함께 삼성물산공사로 재출범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임시 수도였던 부산으로 피난가 삼성물산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전쟁 이후 국가를 지불보증인으로 세워 차관을 받아오면서 정경유착을 통해 점차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53년 제일제당을 세워 처음으로 제조업을 시작해 국산 설탕을 개발했고, 1954년 제일모직을 세워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를 개발해냈다.
1957년에 한국 재계 사상 최초로 신입사원 공개 채용을 개시한 후 1958년 안국화재를 인수해 금융업에도 처음 진출하고 이듬해에 한국 재벌 중 최초로 비서실을 설치해 기업집단으로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1963년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및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을 세트로 인수했다.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해 언론사업에도 진출하고 신문용지 자체 수급을 위해 새한제지도 인수했다.
그러나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으나, 1968년 경영 일선에서 복귀한 후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하여 수원 공단부지를 매입했고, 이듬해 삼성전자 및 삼성-SANYO전기를 세웠다.
이후 1970년 삼성NEC를 세워 전자사업 확장을 개시하며 1973년 제일합섬, 임피어리얼, 1974년 삼성석유화학 등을 세우며 화학이나 관광분야 등에도 영역을 확장했고, 같은 해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산업에 처음 손을 뻗었다.
1976년 본사를 태평로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1977년 삼성종합건설을 세워 건설업에도 손을 뻗고 1979년에 삼남 이건희가 부회장이 되면서 2세 경영체제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80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한 후 1982년 프로야구단 삼성라이온즈를 창단하며 종합연수원을 열었고, 1983년 한국 최초로 64K D램 개발에도 주도했다.
1985년 삼성데이타시스템을 세워 전산사업에도 진출했고 1987년에 삼성종합기술원도 세웠다.
그해 11월 이병철이 사망하자 이건희가 가업을 이어받아 12월부터 회장이 됐고, 1990년대부터 친족분리를 진행해 1991년 신세계백화점과 전주제지, 1993년 제일제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1993년 '신경영 선언'에 따라 로고와 기업 이념 등을 바꾸고 1995년 한국 대기업으로는 최초로 소그룹 제도를 도입했으며, 동년에 삼성자동차를 세워 자동차 산업에도 진출했다.
1997년에는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을 거듭 단행해 2000년에 삼성자동차를 프랑스의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매각했고, 2008년 서초 삼성타운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이건희가 쓰러진 후 아들 이재용이 사실상 지휘봉을 잡아 동년도에 삼성종합화학 등 4개 석유화학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했고, 2015년 (신)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역합병해 '통합 삼성물산'을 출범시켰다.
2016년 삼성정밀화학과 삼성SDI 케미컬사업부문을 롯데그룹에 팔고 2017년 2월 미래전략실 해체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계열사별 독립/자율경영체제 전환 수순을 밟게 되었으며, 삼성그룹 공식 홈페이지도 문을 닫았다.
기사다.

4. 사명

본래 홈페이지의 설명에 근거하면 '삼성이라는 이름에는 끝없는 확장을 지향한다.
삼(三)은 크고 많은 것, 강한 것이라는 뜻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며,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이 빛난다는 의미'로 삼성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2019년부터 삼성은 사명의 의미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힘을 상징하는 숫자 3에 꺼지지 않는 의지를 상징하는 별이라고 쉽게 풀어 설명한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글로 읽는 것보다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영어로는 'SAMSUNG'이라서 네티즌들이 '샘숭', '삼숭'이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실제 미국인들의 발음은 쌤썽에 가깝다.
    서양권 외국인들 사이에서 별명은 'Sammy'. same soon이라고 삼성 애플 소송전 관련하여 삼성을 비꼬는 별명도 있다.

 

  • 러시아에선 Самсунг(삼숭크)라고 칭한다.
    러시아에는 경제가 안 좋았던 시절 삼성이 자국한테 보여준 의리로 거의 자국 기업처럼 취급을 받는다.

 

  • 일본어 정식 발음은 사무슨(サムスン)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ㅓ를 オ행으로 표기하는 관례에 따라 사무손(サムソン)이라 표기하기도 했는데 이러면 성서 인물 삼손의 발음과 같아지는지라 삼성 입장에선 이러한 이름으로 쓰이는게 기업 인지도와 삼성에 관한 검색의 용이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비주류인 일본에서는 사실 삼손 하면 성서의 인물보다도 동명의 게이 잡지가 훨씬 인지도가 높기에, 성인물과 관계되는 것도 기업 입장에서 좋은 일이 아니고. 기업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겠지만 위의 게이 잡지가 워낙 인지도가 높고 바꿨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 글자 차이로 비슷한 발음인 탓에 일본에서는 여전히 그 쪽 농담거리로도 가끔씩 쓰인다.
    물론 일본도 한자를 쓰는지라 三星이라고 써도 모르는건 아니지만 이걸 훈독으로 읽으면 미츠보시가 되고 일본 대기업인 미츠비시와도 혼동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J리그 등 축구계에서는 サムスン이라는 표기를 하지 않고, 한자로 三星이라고 쓴다.

 

  • 중국어로는 한자 三星을 중국어 독음으로 읽어 '싼싱(Sānxīng)'이라고 발음한다.

5. CI

워드마크는 타원형과 색상, 'SAMSUNG'이란 글자가 유기적으로 작용해서 전체적으로 삼성을 표현하는 아이덴티티가 반영되었다.
또 마크 안의 문자를 영어로 표현하여 세계 어디서나 같은 발음으로 읽혀지고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다.
타원형의 디자인은 유연성과 단순함을 강조하며, 우주와 세계무대를 상징하는 타원을 비스듬히 처리하여 동적이고 혁신적인 이미지를 나타낸다.
또 S와 G의 터진 부분을 통해 내부와 외부의 기운이 통하게 하여 세계와 호흡하고 인류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으며, A자의 가로 지름을 제거하여 개방성을 나타내었다.
영문 로고의 디자인은 세련되고 정교하게 처리해 기술주의의 고객지향 의지, 첨단기업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했다.
기본 색상의 경우, 기존에 써 온 청색을 그대로 유지하여 영속성을 지니도록 했다.
그룹 공통색상인 청색(Pantone 286 C : M 80%+C100%)은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색으로 고객과 보다 친숙해지려는 세계 제일주의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상징한다.
1993년 6월, 이건희는 그룹 사내방송 SBC의 한 고발 프로그램에서 삼성 세탁기의 라인 작업자가 칼로 불량인 부품을 대충 깎아내서 조립하는 모습으로 삼성 세탁기의 불량률이 높아지는 현상과, 후쿠다 다미오가 "삼성그룹은 2류나 다름없다"면서 삼성그룹의 문제점과 경영 방식의 모든 것을 바꿔야한다는 개선책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은 뒤, "마누라랑 자식 빼고 다 바꾼다"란 신경영을 시작했다.
이후 삼성의 첫 번째 쇄신은 바로 로고 교체였다.
이전까지 파란 바탕에 사립학교 재단 로고 비스무리했던 그룹 로고가 존재했으나, 삼성전자, 제일모직, 제일기획, 제일합섬, 전주제지, 동방생명, 안국화재, 코리아엔지니어링, 한국안전시스템, 중앙일보, 제일제당 등 대부분의 관계사는 각기 다른 로고를 쓰고 사명도 통일되지 않았는데, 1989년 이후 삼성생명, 안국화재, 한국안전시스템 등 일부 계열사가 그룹 로고를 사용했다.
글씨 로고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만든 일중체를 썼다.
같은 로고라도 업종에 따라 이니셜을 넣기도 하는데, 제일제당은 로고 중앙에 C, 제일모직은 W, 안국화재는 U, 신세계백화점은 D, 제일합섬은 T, 한국안전시스템은 V를 썼다.
이렇게 다양한 로고들은 1993년 3월부로 새로운 로고로 바뀌게 되었는데 20억의 비용을 들여 미국 L&M에서 직접 디자인했고, 이때 나온 디자인이 바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파란색 타원 속에 S Λ M S U N G 이라 쓰인 로고다.
1993년, 이건희가 신경영을 표방하며 변경한 로고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파란색 로고다.
그러나 새로운 로고에 그룹 내 고위 임직원들은 단체로 최면에 걸렸는지 엄청난 거부감을 표출했다고 했으며, 특히 안국화재, 한국안전시스템 등 대부분의 사명을 삼성으로 통일하여 영업에 차질을 입힐 것이라 걱정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 많은 기업들이 로고와 회사명을 바꾸면서 도색 업체들과 스티커 제작 업체들이 때아닌 호황을 맞았었다고 전해진다.
1938년 이병철이 창업한 삼성상회에서 당시 판매하던 별표 국수에 들어간 상표를 삼성 CI의 기원으로 본다.
별표 국수에 들어간 상표는 삼성상회의 로고가 아니라 별표 국수의 상표다.
1949년에 원 3개에 별이 가운데 있는 로고를 사용했다.
이후 1965년에 그룹 로고가 제정되면서 CI를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위에서도 서술했지만 이당시 삼성의 몇몇 관계사들은 그룹 로고를 응용한 로고를 사용했다.
신세계백화점이나 삼성 라이온즈가 대표적. 1969년에 설립한 삼성전자의 당시 CI를 삼성그룹의 CI로 오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으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그룹 전체가 통일된 CI를 사용한 시기가 아니다.
현재의 CI는 이건희가 회장으로 취임한 후 1993년 신경영 선언과 함께 기업 브랜드 쇄신을 목적으로 변경, 통일한 것으로 오벌(Oval) 마크라고도 한다.
세번째와 네번째의 차이가 뭔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오벌 마크 안에 들어간 SAMSUNG의 장평이 2006년 이후로 좁아졌다.
한글 서체는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영문 서체는 Universe Condensed Bold를 사용한다.
이렇게 CI가 변경되면서 관계사들 대부분이 통일된 CI를 가지게 됐다.
CI 통일 당시에는 이런식으로 사명이 오벌 마크 오른쪽 하단에 고정된 형태였다.
이후 CI 가이드라인이 개정되면서 사명 배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삼성전자는 2015년 이후로 기존의 CI를 사용하지 않고 워드마크를 CI로 사용한다고 결정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타원형 마크의 짙은 파란색은 경직된 느낌을 줘 혁신을 지향하는 정보기술(IT) 기업에는 맞지 않는다.
워드마크는 특정한 색이나 모양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롭게 쓰일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것은 삼성전자의 마케팅에 국한되며 공식 로고를 바꾼 것은 아니다.
이미 삼성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CI는 예전부터 워드마크만 사용했기 때문인 것도 있고 다른 세계적인 기업들의 로고도 대부분 글자만 있는 형태의 로고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계열사들의 경우 기존 로고를 계속 사용한다고 한다.
삼성전자가 워드마크로 로고를 변경하면서 해외에서 삼성그룹 전체의 로고를 워드마크로 변경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의 인식이 대부분 삼성하면 삼성전자를 떠올리기 때문. 이후 삼성전자 CI는 삼성의 고유 컬러인 파란색도 빼버리고 검정색을 사용하면서 이재용 체제에서의 삼성전자는 기존 삼성의 이미지에서 탈피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2022년 4월에는 금융 관계사 통합 브랜드 삼성금융네트웍스를 발표했으며 이후 단계적으로 교체를 단행해 7월 1일부로 삼성금융네트웍스 산하 5개사(생명, 화재, 카드, 증권, 자산운용)의 CI 변경을 공식 발표했다.
기존의 오벌 마크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으며 폰트도 교체해 금융 관계사에 한해서만 사용한다.
전자에 이어 그룹 핵심 관계사로 분류되는 금융사들마저 오벌 마크를 없애고 독자적인 브랜드를 채택한 것을 봤을때 이재용 체제에서는 오벌 마크가 삼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서의 지위에서 점차 그 영향력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다.

6. 삼성찬가 (1974 ~ 1993)


작사는 이은상, 작곡은 이흥렬이 맡았다.

7. 우리의 노래 (1993 ~ )


1993년 제2창업 5주년을 맞이해 사원 공모를 통해 채택되었으며, 작곡은 <그리운 금강산>으로 유명한 최영섭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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