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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구원파 종교 사이비 다니는 교회 첫열매들 이단 부인 성경

by 채은아빠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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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필

필명 : J.Y. Park "The Asiansoul"
출생 : 1971년 12월 13일 (50세), 서울특별시 성동구(現 서울특별시 광진구)
국적 : 대한민국
본관 : 밀양 박씨 (密陽 朴氏)
신체 : 183cm, 74kg, AB형
현직 : JYP엔터테인먼트 CEO 및 대표 프로듀서
부모 : 아버지 박명노, 어머니 윤임자
형제자매 : 1남 1녀 중 둘째
배우자 : 배우자(1980년생, 2013년 결혼)
자녀 : 장녀(2019년생), 차녀(2020년생)
학력 : 서울용마초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졸업) 배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지질학 90 / 학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정치학 / 중퇴)
종교 : 개신교 (교파 불명) → 무종교 → 개신교(초교파)
병역 : 공익근무요원 소집해제(現 사회복무요원 소집해제)(1999년 4월 ~ 2000년 10월)
데뷔 : 1992년 그룹 '박진영과 신세대'
별명 : 떡고, 고릴라, 섹시한 고릴라, 섹고
MBTI : ENFJ

2.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음악 프로듀서, 작곡가, 작사가, 안무가, 기업인 이다.
나는 딴따라야 계속 그럴 거야- No Love No More 中
발군의 춤실력과 끼로 한국 가요계 역대 최정상급 춤꾼이기도 하며, 딴따라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되는 댄스 가수이기도 하다.
실제로 딴따라의 인식과 이미지 자체를 크게 바꾼 장본인 이기도 하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수장으로써 현재 JYP엔터테인먼트의 주식 17.72%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2019년 7월 주식시장에서 시가 기준으로 1,300억원에 달한다.
박진영은 과거에는 JYP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였지만 현재는 아니다.
그러나 사내 등기이사로서 경영상 법적인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으며 여전히 본사의 대표적인 프로듀서로서 아티스트 및 프로덕션, 영업 업무를 맡는다.
특히 회사 내 신인 아티스트 런칭 때는 최종 결정 권한을 맡고 있다.
영문 활동명로는 J.Y. Park 혹은 '진영 박'의 알파벳 이니셜인 JYP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프로듀서로서는 필명인 J.Y. Park "The Asiansoul"이라는 이름을 쓴다.

3. 이력

1990년대에는 가수였고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음원 저작권 수입 1위를 기록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LP, 카세트테이프, CD, 다운로드 & 스트리밍까지 음원시장의 변화를 전부 겪어본 가수이기도 하며 본인의 노래 <살아있네>에서도 언급했다.

4. 성장 과정

1971년 12월 13일 서울특별시 광진구에서 아버지 박명노, 어머니 윤임자 사이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해보는 것은 다 해보는 '사고뭉치'였단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직장이 해외 지사로 발령이 나면서 온 가족이 약 2년 반 동안 미국 생활을 하게 됐다.
본적지는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보덕리. 군산출신 연예인 눈부신 활약다.

그리고 이때부터 춤에 재능을 보여서 흑인들과 댄스 배틀을 해도 1등을 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미국 생활은 그로 하여금 흑인 음악에 대한 매력을 직, 간접적으로 체득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 후 박진영은 더욱 음악에 빠져들었고 부모님은 자식의 뜻을 존중해 현재의 "딴따라" 박진영이 탄생했다.
연세대학교 지질학과 90학번이며, 보통 알려진 1994년보다 2년 전인 1992년 '박진영과 신세대'로 대학 재학 중에 데뷔했지만 이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부터 작곡가 김형석의 밑으로 들어가 2년 간 온갖 수발을 들며 작곡의 A부터 Z까지 모두 배워오는 등 본격적인 창작의 밑거름을 다지기 시작한다.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3반 과방에서 1991년-92년 지질학과 MT 앨범을 뒤져보면 박진영이 나온 사진도 한 장 있다.
가수로 데뷔한 뒤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입학했다가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성실하며, 학습 의지가 높아 교수 추천을 받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 편입했다.
편입 과정에서 지질학과 출신에다가 딴따라 연예인이 왜 대학원 정치학과에 가냐고 교내 여론이 말이 아니었지만, 교지에서 사실을 해명했다고 한다.

5. 1990년대: 가수 박진영

연세대 재학생이었던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이 소속사 저 소속사 다니며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들려줬지만 번번히 독특한 체형과 마스크 때문에 거절을 당했다.
당시엔 김원준 같은 귀공자 마스크가 아니면 연예계 데뷔가 쉽지 않았다.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회사 중 한 곳이 다름아닌 SM엔터테인먼트였다.
계속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걸 보다못한 클론의 구준엽이 박진영을 직접 이수만과 만나서 오디션을 보게 해줬지만 결국 떨어졌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유명한데 이수만이 퇴짜를 놓으면서도 박진영의 실력 자체는 인정했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곡만 팔지 않을래?"라고 요구했다.
그 말에 울컥해서 "안 팔아요!" 라고 소리치고 나와버렸다.
그 곡이 바로 날 떠나지마였다.
그런데 이수만이 직접 밝히길 그 이후로 노래와 함께 같이 데뷔를 고려해보려고 했으나 박진영이 그 뒤로 다시 안 온 것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해명과 지금이라도 오디션을 보러오면 다시 받을 의향이 있다는 농담을 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김형석이 소속된 기획사의 오디션에 뽑히는 데 성공했고 데뷔 준비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김형석은 원래 발라드 곡이었던 날 떠나지 마를 댄스곡으로 편곡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박진영은 데뷔를 위해 절치부심으로 준비한다.
그리고 1994년 9월, 가요계에 혜성같이 데뷔한다.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날 떠나지마'는 광고음악으로 대중들에게 입소문을 탔는데, 이 노래가 삽입된 광고가 오리온 센스민트 광고였고, 이 CF의 등장하는 배우가 바로 당시 신인이었던 정우성이었다.
이 CF를 보고 수 많은 소녀팬들이 잘생긴 외모에 춤과 노래까지 완벽한 슈퍼스타의 탄생에 가슴 설레였으나 데뷔 무대에 올라온 박진영을 보고 실망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어쨌든 흑인 Feel을 강조했던 그의 춤과 노래는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으며, 당시 엉덩이춤은 대중에게 남자의 섹시코드를 거의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강조했던 충격적인 안무로 기억된다.
결국 인기에 힘입어 1995년 3월 1일부터 8일까지 음악프로에서 4번의 1위를 수상했으며 후속곡으로 활동한 너의 뒤에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의 1집은 1995년까지 47만 장의 음반 판매량을 달성했다.
1995년 2집에서는 청혼가를 타이틀곡으로 해서 활동했으며 그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 R.ef 등 초대형 가수가 많았음에도 가요톱텐에서는 1위를 차지했고 다른 가요프로그램에서도 1위 후보까지 오르면서 계속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후속곡인 '엘리베이터'는 묘한 분위기의 가사나 이소라와 함께 찍은 뮤직비디오의 성적인 분위기가 파문을 불러왔지만 당시 경향신문이 '한국의 타이슨'이라는 별칭을 붙였을 정도로 잘 나가는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진짜 대단한 것이, 그때는 지금보다 더욱 연예인 외모의 잣대가 심한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박진영은 섹시스타의 이미지, 그리고 세칭 명문 연세대 재학생이라는 그의 학벌과 조리있는 말투 덕분에 뇌섹남의 이미지, 거기다 자신의 외모로 맘껏 농담하고 즐길 줄 아는 여유까지 겸비해 정말 외모 빼고 모든 걸 다 가진 남자였다.
게다가 그룹도 아닌 솔로다.
그리고 특유의 긴 팔 덕분에 흐느적거리는 춤선과 잘 어우러졌다.
1996년과 1998년에 각각 3, 4집을 발표해서 '그녀는 예뻤다', '썸머 징글벨', '난', '허니' 등의 히트곡을 계속 내면서 가수로써 성공했고 싱어송라이터로서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승승장구하면서 2001년에 발매한 6집 《Game》도 'Swing Baby', '난 여자가 있는데' 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흥행에 성공했으나 이후 6년여 간 음반 발매는 멈추었다.

6. 2000년대: 프로듀서 박진영

프로듀서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시절. 2000년대에는 본인의 음악 활동보다는 프로듀서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90년대말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god가 '국민 그룹'이라고 불릴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박지윤이 박진영의 프로듀싱을 받으며 '성인식'으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 초반이다.
2002년에는 새롭게 데뷔시킨 비도 데뷔곡 반응은 심심했으나 후속곡인 '안녕이란 말 대신'이 크게 히트하고, 별의 경우도 '12월 32일'이나 '안부'같은 곡이 상당히 인기를 얻는다.
보컬 그룹으로 결성한 노을도 푸쉬에 비해 크게 인기를 얻었다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나름의 인지도 정도는 얻는데 성공한 편. 2005년에 데뷔앨범이 나온 임정희는 데뷔 전 기대치에 비해 조금 아쉬운 결과를 얻는다.
다만 데뷔곡인 'Music is my life' 자체는 많이 알려진 편이다.
2003년 송대관이 유행가를 부를때 독특한 발걸음이 특징인 전용 안무를 직접 짜줬다.
링크, 링크 22000년 후반에는 본격적으로 아이돌 그룹들을 데뷔시키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2007년에 원더걸스를 데뷔시키고 이때 곡인 Tell Me는 대한민국에 UCC 열풍과 후크송 열풍을 몰고 온 데다 현재 불고 있는 걸그룹 열풍의 시발점이다.
이때 원더걸스는 가요계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고 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고 연이어 'So Hot'과 'Nobody'까지 연이어 대히트를 시킨다.
재미있게도 한때 자신을 떨어뜨린 이수만의 소녀시대를 앞질렀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2008년엔 2PM과 2AM이 데뷔한다.
2PM 역시 남성적인 매력을 뽐내며 정상급 보이그룹의 반열에 오른다.
대부분의 곡을 박진영이 프로듀싱한 만큼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시기였다.
거기에 2007년에 발표한 본인의 7집 《Back To Stage》도 나름 인기를 얻는다.
'니가 사는 그 집'이 독특한 안무와 인상적인 가사를 기반으로 인기를 끌었고, 음악적으로도 인정받아서 흑인 음악 전문 웹진 리드머에서 꼽은 2007년 올해의 알앤비 앨범으로 꼽히기도 했다.
다만 본격적으로 '미국병'에 걸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미국에서도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시도하며 여러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하기도 하고 JYP의 미국 지부를 설립해서 소속 연습생들의 미국 데뷔를 추진하기도 했다.
다만 성과는 좋지 않았던 편이다.
특히 2008년에 국내에서 인기가 최절정기에 다달은 원더걸스를 미국으로 데려가 활동하게 하는 바람에 국내 활동이 올스탑되고 멤버가 교체되는 내홍까지 겪게 된 것은 원더걸스 팬덤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지탄 받는 부분이다.
좋게보자면 훗날 JYP출신 아티스트들의 해외 활동에 밑거름이 된 시행착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최고의 시점에 국내 활동 기회를 놓치고 내리막길을 타버린 원더걸스의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없을 수가 없다.
정리하자면, 2000년대는 주로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여러 가수들을 정상에 올려놓거나 못해도 중박은 치는 등 상당히 성공적인 성과를 얻었으나, 그것을 기반으로 무리한 도전을 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 본 시기라 할 수 있다.

7. 2020년대

2020년 8월 12일, 선미와 함께 싱글 When We Disco를 발매하며 간만에 본인의 히트곡을 배출해냈다.
이걸로 광고까지 찍었으니 성공적인 활동을 한 셈이다.
2021년 4월 30일, ITZY의 4집 미니앨범 GUESS WHO의 타이틀곡 '마.피.아 In the morning'에 작사, 작곡, 편곡으로 참여했다.
평가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서 박진영에 대한 여론 역시 좋지 않은 상황이다.
2017년 SIGNAL에서 욕먹은 건 온데간데 없냐는 상황이다.
그나마 마.피.아가 후중독으로 차트 상위권까지 올라간 뒤에는 비판이 좀 잠잠해졌다.
전반적으로는 비트는 좋으니 랩 작사만 하지 말라는 평이 많다.
2021년 6윌 9일, TWICE의 앨범인 Taste of Love의 타이틀곡 Alcohol-Free를 단독으로 작사 작곡 하였으며 편곡으로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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