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깃발 : 문장
행정
국가 : 이탈리아
광역시 : 나폴리 광역시
시간대 : UTC+1
인문 환경
광역 인구 : 2,198,000명
인구 : 967,000명
인구 밀도 : 8,247명/km²
면적 : 117.27km²
언어별 표기
이탈리아어Napoli영어Naples프랑스어스페인어Nápoles포르투갈어독일어Neapel그리스어Νεάπολις(고대 그리스어), Νάπολη(현대 그리스어)러시아어Неаполь : 이탈리아어 : Napoli : 영어 : Naples : 프랑스어 : 스페인어 : Nápoles : 포르투갈어 : 독일어 : Neapel : 그리스어 : Νεάπολις(고대 그리스어), Νάπολη(현대 그리스어) : 러시아어 : Неаполь, 이탈리아어 : Napoli
영어 : Naples, 프랑스어
스페인어 : Nápoles, 포르투갈어
독일어 : Neapel
그리스어 : Νεάπολις(고대 그리스어), Νάπολη(현대 그리스어)
러시아어 : Неаполь
2. 개요
Vedi Napoli e poi muori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로마와 밀라노에 이은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탈리아 캄파니아의 주도(州都)이자 중심 도시며, 이탈리아 통일 전까지 천년 가까이 북이탈리아와는 전혀 판이한 역사를 이어온 남이탈리아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지금도 남이탈리아의 중심 도시이다.
지중해에 닿아 있는 항구도시로 영어로는 네이플스(혹은 네이플)라고 한다.
나폴리라는 이름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스의 식민도시 네아폴리스가 그 기원이지만 아직까지 학계에선 논란이 있다.
참고로 위 사진에 보이는 봉우리 두개의 높은 산은 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화산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날, 북풍이 아닌 동풍이 불었다면 폼페이 대신 나폴리가 멸망했을 것이다.
3. 역사
나폴리의 중근세를 함께 한 카스텔 누오보. 이곳을 장악해야 도시를 얻을 수 있었다.
4. 여명기
개요에서 기술되었듯 논란이 있지만 옛 나폴리 땅에 그리스인들이 식민지 도시국가인 네아폴리스를 세웠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네아폴리스라는 단어는 네아가 new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폴리스는 도시의 의미이다.
즉, 신도시. 신도시가 있다는 건 구 도시도 있다는 의미고, 그 구도시가 다름 아닌 후에 파르테노피아 공화국의 어원이 되는 파르테노페(Parthenope)이다.
원래 그리스 정착지는 기원전 20세기쯤부터 새워졌지만 기원전 9세기쯤에 지금의 나폴리 시의 남서쪽(지금의 카스텔 산 엘모 (Castel Sant' Elmo)가 있는 곳 근처)에 파르테노페가 새워져서 번성하다가 기원전 6세기쯤에는 쇠퇴하고서는 약간 북동쪽 내륙(지금의 나폴리 중심가)으로 들어가서 재건한 게 네아폴리스가 되었다고 하며 현대에는 둘 다 나폴리시에 속한다.
그리스인들이 세웠다지만 쿰마인들이 주민이었으며, 후에 에트루리아의 연맹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라티움족의 반란에 의해 에트루리아가 엎어지고 그 자리에 로마 왕국이 들어서면서 나폴리도 로마의 일원이 된다.
폼페이가 대지진과 화산 폭발로 큰 타격을 입고 그저 그런 농촌이 되기 전까지는 번창하는 폼페이-헤르쿨라네움 도시권에 속해 있었다.
긴 로마 제국의 황금기에도 끝이 찾아와 훈족과 게르만족의 발흥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폴리 지역에는 동고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동고트 왕국(493~540)이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멸망당했고, 나폴리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된다.
이때부터 나폴리는 1300여 년간 북부, 중부 이탈리아(롬바르디아 왕국, 교황령)과 다른 역사를 걷게 된다.
5. 시칠리아 왕국 시대
11세기 중반,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지역에서 온 기사인 루제로 1세가 동로마 제국령이었던 남이탈리아를 점령했다.
11세기 후반에 아랍 사라센 왕국령 시칠리아 섬까지 점령한 이들은 2대째인 루제로 2세가 대립교황 아나크레투스 2세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아 왕국으로 성립되었다.
노르망디는 그 기원이 바이킹이니, 바이킹이 지중해까지 진출해 세운 왕국이 바로 이 시칠리아 왕국이다.
6. 나폴리 왕국 시대
시칠리아 왕국의 왕통이 혼인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게로 넘어가자, 황제와 사이가 나쁜 교황의 요청으로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아우며 앙주·멘·프로방스의 영주인 샤를이 와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절멸시키고 새로운 시칠리아 왕이 돼 앙주 왕조를 세웠다.
샤를은 나폴리의 영주로서는 괜찮았으나 시칠리아에서는 동로마 제국 정복을 위한 중과세로 인해 민심을 잃었고, 결국 1282년 3월 30일에 시칠리아의 만종이라는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샤를 왕과 로마교황에게 불만을 품은 시칠리아 주민들이 프랑스계 주민 4000여 명을 학살하고 혁명을 일으킨 이 사건으로 인해 샤를 왕은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잃고 시칠리아 왕국은 분열돼 시칠리아 섬에는 바르셀로나 가문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가 왕위에 등극하고 남이탈리아는 앙주 왕조의 통치하에 놓인다.
당분간은 서로가 시칠리아 왕국이라고 주장했지만, 수도가 나폴리인 반도측이 편의상 구분하기 위해 나폴리 왕국이라고 불리기 시작하면서 이 명칭이 보급되었다.
앙주 왕가의 직속 적통이 끊기면서 지파인 앙주-두라초 가문과 앙주 왕가를 모계로 계승한 발루아-앙주 가문이 내분을 벌려 발루아-앙주 가문의 르네(레나토) 1세가 나폴리 왕위를 획득했으나, 1442년 아라곤왕 알폰소 5세가 르네 1세를 무찌르면서 한동안 중단되었던 아라곤과 나폴리의 싸움은 아라곤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모계로 앙주 왕가의 계승을 주장하며 1494년에 나폴리를 침공해 잠깐 나폴리 왕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1504년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에 의해 앙주 왕가의 권리는 소멸되었고 나폴리 왕국은 당분간 아라곤 연합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2세기 동안 나폴리 지역은 왕국의 지위를 잃고 스페인 국왕이 보낸 나폴리 총독 관할지역이 되는 신세가 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 잠시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카를로 7세에 의해 독립 왕국의 명칭을 되찾기까지...다.
7. 프랑스 혁명과 양 시칠리아 왕국 시대
허나 카를로 7세가 죽고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파르테노피아 공화국(1799~1806)이 세워지고,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했다가(1806~1815), 나폴레옹 실각 후 빈 회의의 결과에 따라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고 시칠리아 왕국과 병합되어 양시칠리아 왕국(1816~1861)이 세워졌다.
이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일어나 주세페 가리발디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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