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이름 : 이현세(李顯世)
출생 : 1954년 9월 19일 (67세) 대한민국 강원도 울진군
본관 : 전의 이씨
학력 : 월성국민학교 월성중학교 경주고등학교
데뷔 : 1979년 '저 강은 알고있다'
2. 개요
대한민국의 만화가.대한민국의 만화가 지금은 웹툰으로 활동 중이며 겸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문화컨텐츠교육센터 대표교수,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1992~1996), 경찰홍보 자문위원, 한국만화영상진흥원 3대 이사장(2009~2012) 등의 직함을 갖고 있고 2006년에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도 맡았다.
대표작으로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
3. 상세
대한민국의 만화가 중 인지도 면에서 1, 2위를 다투는 인물. 지금은 구세대 작가로 명성이 좀 떨어진 것 같지만 전성기였던 7, 80년대에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만화계의 지존 중의 지존이었다.
특히 최고 히트작인 공포의 외인구단은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를 통해 TV 광고에 섭외될 정도의 지명도를 확보하였다.
좋게 말하자면 선이 굵고 강렬한 작품을, 나쁘게 말하면 철저하게 시대의 수요에 맞게 마초스러운 작품을 주로 그렸고, 이런 작풍은 1980년대 당시의 한국정서에 맞았기에 대중의 공감을 얻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그때의 색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람에(다시 말하자면 매너리즘) 세월이 지나며 명성이 쇠퇴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상당수의 작품에서는 컴플렉스적인 히스테리를 드러내는 정신상태가 위험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성인만화적인 사고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드는 경향이 강하다.
작중 캐릭터들 중 인기가 높은 캐릭터를 골라서 돌려 사용하며, 2010년까지도 이런 시스템으로, 대부분이 대본소 만화나 가끔 웹툰 아니면 스포츠 신문연재로 유료 연재로 살고 있다.
80년대 인기 작가들이 몰락한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셈이다.
자주 쓰는 캐릭터로는 까치(오혜성), 엄지, 마동탁 등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이현세의 레귤러 멤버 참조.캐릭터는 동일하더라도 일단 한번 작품을 내면 그 속편격인 작품은 절대로 내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켜왔다고 한다.
그만큼 다양한 소재에 도전하고자 하는 도전정신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반면 부실한 설정으로 인한 비판도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에 추가 기술한다.
한편, 이현세의 일대기를 다룬 KBS 1TV <인간극장> '고등어와 크레파스'가 95년 방영됐는데 영화배우 박세준이 주인공 이현세 역을 맡았다.
4. 만화방 체제의 개편
1982년 공포의 외인구단의 성공은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만화시장인 만화방의 시장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었다.
공포의 외인구단 이전에는 대부분의 작품이 단편 위주였는데, 이는 빨리 완결을 보고 싶어하는 독자의 요구, 책을 갖추기 쉽다는 업주의 요구, 현금 회전이 빠르다는 출판사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독자의 요구가 "장편은 좋지만 완결은 빨리 보고 싶다"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로 인해 출판사에서는 장편을 빨리 완결지을 수 있는 작가들을 선호했고, 작가들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토리, 작화, 배경 등 분업 체제를 도입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분업 체계 자체가 "만화방 시스템"이라는 용어로 굳어졌다.
분업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문제는 빠른 완결을 위해 작품 질이 저하되었다는 점과 이름만 달 뿐 작품에 손도 대지 않는 일부 작가에 의한 착취 구조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유명 작가의 경우도 직접 작품을 관리하는 A팀과 그렇지 않은 B팀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공포의 외인구단 성공 신화는 이러한 장편 만화방 만화를 모두 이현세의 아류로 만드는 부작용도 일으켰다.
이현세는 모작들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1984년 까치, 엄지, 마동탁을 의장 특허 등록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이현세 프로덕션을 설립, 문하생들에게 독립의 기회를 주는 한편 이현세 아류들과의 전쟁을 선포했으나 독립한 문하생들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결국 1990년대 초 이현세 프로덕션을 해체했다.
당시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독립한 문하생이 박원빈으로, 이후 박원빈은 야설록이 스토리를 맡은 제2의 킬러 시리즈로 대본소 만화를 모조리 느와르물로 바꿔놓는 대박을 터뜨렸고, 이현세는 오히려 이에 영향을 받아 회색도시를 통해 느와르물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로 인해 작가들의 작품들이 개성 없이 획일화된 데다 1990년대 초반 일본만화 개방 전 해적판들의 범람과 도서대여점 출현 및 만화방 폐점, 1990년대 후반 청소년보호법 발효로 인해 경쟁력을 잃었고, 이현세도 1990년대 중반 만화방 시스템 탈피를 선언하고 잡지 및 신문 연재에 집중했다.
그 밖에 문정후와 김성모가 이현세 문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아마게돈 애니메이션화
아이큐 점프 연재작이었던 아마게돈은 90년대 초 애니메이션 산업개발 열풍이 불어닥칠 당시 애니화되어 극장에 걸렸지만 쫄딱 망했으며, 이후 출시된 플라이트 슈팅 게임이나 그보다 더 뒤에 제작된 RTS 게임 역시 쫄딱 망했다.
문제는 이 실패가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상한 인식을 국내 높으신 분들에게 심어주어 산업이 성장할 기회를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이현세 본인의 말로는 너무 진행이 이상하고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게 최대 패인. 결과적으로 아마게돈의 애니메이션화는 이현세의 경력과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일대 자폭테러가 되어버렸다.
이현세 본인도 자신이 만화가로서는 몰라도 애니메이터로서의 능력은 너무나 없다는걸 절감했다고 하지만, 이후 애니메이션과 교수도 겸직하며 애니메이션 작업에 여러가지로 관여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사실, 아마겟돈의 실패와 이현세가 애니메이션과의 교수가 된 기이한 일은 출판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같은 "만화"로 치부해 버리는 국내 높으신 분들의 인식부족과 애니메이션 쿼터제의 미시행, 만화 산업에 대한 멸시등이 그 원인이라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당장 교수가 된 것만 해도 김영삼 정권 때 쥐라기 공원 쇼크로 인한 컨텐츠 산업 진흥법이 통과된 후 전국의 4년제 혹은 2년제 대에서 우후죽순격으로 애니메이션과나 만화과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인지도 있는 인물을 섭외해서 홍보는 해야겠고 진짜 애니메이터 중에서는 그렇게 인지도 있는 인물이 없고 하다 보니 만화가인 이현세가 애니메이션 학과 교수가 된 것이다.
이현세는 이후 심형래 같은 경우와 달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렇게 만들면 안 된다는 아마게돈 백서를 만들어서 상세한 제작내역 및 제작비, 수익 및 제작 일화를 공개했다.
다만, 이후 방송 인터뷰에서 "재수가 없어서 실패했다"는 식으로 발언하여 약간의 논란이 일기도 했다.
6. 천국의 신화의 수위
흔히 천국의 신화는 수간 및 강간, 근친 등의 요소로 인해 예술과 외설의 경계로 인한 논란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정확한 내용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논란이다.
문제시된 내용은 원시시대에 대지의 여신형 캐릭터가 동물들과 정사를 한 뒤 동물들을 낳는 것 등이나, 이에 대한 묘사는 농담 하나 안 보태고 성교육 비디오보다도 볼 게 없다.
대지의 여신은 원시인들이 자기 동물들을 죽여버리고 잡아먹는데 크게 상심하여 반 자살 기믹으로 사라지며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일종의 야만과 전설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시나리오 전개상으로도 크게 부자연스럽거나 문제될 부분이 없다.
실제로 검사 측은 상황이 예술과 외설의 판가름으로 흘러가자 성인용 천국의 신화에 무혐의 처리를 내리고, 미성년자보호법 2조를 근거로 청소년판 천국의 신화를 약식기소하게 된다.
문제시된 내용을 수정하여 발매된 청소년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연상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이현세는 1998년에 벌금형을 선고받고 이에 항소했으나 2000년에 1심에서 패소, 2002년에 2심에서 승소, 2003년에야 최종심에서 미성년자보호법 2조가 위헌판결을 받게 되며 승소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스트레스 때문에 애초 100권 기획이었다고 하는 천국의 신화는 훨씬 짧게 끝났다.
자세한 사항은 천국의 신화 문서 참조.다.
7. 스토리 작가 소송
한편 히트작 중에 실제로는 스토리 작가가 따로 있는 만화가 대부분으로, 김민기나 야설록 같은 스토리 작가들이 주로 이현세표 히트작들의 스토리를 써냈다.
이현세가 직접 이름을 명확히 밝힌 야설록의 경우와 달리 초창기 멤버였던 김민기는 나중에 공포의 외인구단 저작권 문제로 소송을 걸었다.
김민기와의 불화는 공포의 외인구단이 만화 이외의 다른 매체로 옮겨지던 시절부터였다.
김민기는 "스토리가 만화로 만들어졌을 때는 만화가의 재능이 앞서는 일이겠지만 영화로 만들어졌을 경우에는 원작자의 몫"이라고 주장했고, 이현세는 "극본을 갖고 와서 써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흥행에 성공했다고 더 많은 고료를 요구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지옥의 링을 마지막으로 결별했고, 김민기는 이후 고행석과 콤비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관련링크이 문제에 있어서는 스토리 작가에게 선금을 지급하는 거래 방식이 관건이다.
당시 대본소 시스템은 총판의 책 판매부터 출판사의 고료 지급까지 대부분의 거래가 현금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책이 얼마나 팔릴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시장 상황에서 업계 종사자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따라서 출판사 및 작가는 선금 지급을 통해 스토리 작가에게의 의무를 다했고 이후의 만화 판매의 리스크는 출판사 및 작가가 짊어진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를 벗어난 영화화 및 애니메이션화에 대해서는 스토리 작가의 지분에 대한 재협의가 필요하다는 스토리 작가측의 주장도 타당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