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욱 논란 교수 찌라시 이우고등학교 이우경 이우가마카라스 이우근 학도병

by 채은아빠 2022. 7. 18.
반응형

1. 프로필

출생 : 937년 8월 15일, 남오 강녕부 상원현(現 장쑤성 쉬저우시)
즉위 : 961년 9월 16일, 남당 서도 건강 황궁(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 978년 8월 13일 (향년 41세), 북송 동경 개봉부(現 허난성 카이펑시)
능묘 : 북망산(北邙山)
재위기간 : 남당 황태자, 961년 2월 19일 ~ 961년 9월 16일, 제3대 황제, 961년 9월 16일 ~ 975년 12월 12일
성씨 : 서(徐) → 이(李)
부모 : 부황 원종모후 광목황후
형제자매 : 10남 3녀 중 6남
배우자 : 대주후, 소주후
자녀 : 2남 1녀
시호 : 문헌소회효민황제(文憲昭懷孝愍皇帝)
제호 : 후주(後主)

2. 개요

오대십국시대의 10국(十國) 중에 하나인 남당(南唐)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촉한의 마지막 황제 유선과 함께 후주(後主)라고 불린다.

3. 생애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건국하고, 세력을 확대해오자, 이에 겁먹은 이욱은 당제국에서 강남국(江南國)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가 아닌 '국주'(國主)를 자처했으나, 조광윤에게 나라가 멸망당했다.
멸망 직전에 조광윤에게 신하를 보내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천하를 갈라서 다스립시다.
" 라고 말하자 조광윤은 '외간 남자가 내 침대에서 코골며 자는 것을 어찌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라고 화내며 이를 거부하고 남당을 멸망시켰다.
결국 남당이 망한 후 개봉에 끌려와서 살다가 송태종(宋太宗) 재위 기간, 생일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미인'이란 시를 지었다가 이에 격노한 송 태종에게 독살당했다.
독(毒)이 너무나 독하고 고통스러운 나머지 온몸이 우그러지면서 피를 토하고 폴더폰마냥 어깨와 엉덩이가 붙어버렸다고 한다.
근데 어찌 보면 그가 독살당한 것은 그의 자업자득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는 남당 제일의 명장으로 건국 때부터 나라를 섬긴 임인조를 송나라의 반간계에 걸려 독살했기 때문이다.
황제로서의 능력은 실격자로, 국정을 제대로 살피는 것보다는 문학 작품을 짓고 부르는 데 더 열중했다.
때문에 시인으로서는 일류급이었지만, 황제로서는 삼류라는 평가조차 과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황음무도하거나 자신의 취미를 위해 백성을 혹사시키거나 가혹한 징세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욱이 사망한 것을 들은 옛 남당 백성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원 부인인 소혜황후 주아황과 결혼해서 10년을 살았는데, 부인이 병석에 눕자 이를 간호하러 온 동생인 주여영과 눈이 맞아 부인이 죽은 후 동생과 재혼했다.
그래서 언니를 흔히 '대주후'(大周后)라고 했고, 동생을 '소주후'(小周后)라고 했다.
동생인 소주후의 운명은 망국과 함께 비참해지는데, 야사에 따르면 송 태종이 자주 소주후를 궁궐에 불러 겁탈했다고 한다.
이를 안 이욱이 분노하자, 그 때문에 송 태종이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야사의 진실 여부는 차지하고, 부인인 소주후는 이욱이 독살된 후, 곧 세상을 떠난다.

4. 예술가

예술가 황제로 송휘종 조길과 함께 이름이 높고, 예술 때문에 나라를 망친 황제로 또 함께 이름이 높다.
남당의 수도인 금릉성이 포위된 마당에도 문학 작품을 짓고 노래부르는 데 열중할 지경이었으니... 실제로 그는 시문에 조예가 깊고 서화(書畫)와 음률에 정통한 만능 예술인이였다.
그러나 송 휘종이 천부적인 예술가적 재능을 지닌 황제로서 자기 취미를 위해 백성들을 혹사시킨 반면에, 이욱은 자기 취미를 위해 혹독한 징세를 하거나 백성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도 예술적인 면에서 일대 종가를 이루어 송대 문학가 4인방을 꼽으면 꼭 들어갈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당대 서적에서도 황제로 태어나지 않고 문학가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송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송대 문학가 4인방에 들어갈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는데 그중 '사(詞)'의 명인으로 유명하다.
훗날 송나라에서 태동하게되는 송사(宋詞)에도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전기에는 황제로 기세등등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기에 화려하고 로맨스 있는 문학을, 후기에는 망국의 군주로 유폐 생활을 해야했기에 절절하고 감성있는 문학을 창작했는데 인간의 흥하고 쇠함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이욱의 작품은 후기작을 최고품으로 치며, 전기작도 고급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아래가 바로 문제가 된 우미인(虞美人)이라는 사(詞)이자 이욱이 후기에 지은 문학이다.

절절하기 그지없다.

아래는 잘나가던 시절에 지은 시 일곡주(一斛珠) 위와 비교해보자.

신기하게도 글을 쓸 때 붓이 아닌 비단을 김밥 말듯 말아서 글씨를 썼다고 한다.
아래 나오는 어필이 영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이 정도로 쓰는 일 자체가 매우 힘들다.
이욱의 어필入其國,其教可知也。其為人也(예기·경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