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2. 개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프로 축구 클럽. 연고지는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홈 구장은 안필드.1892년에 창단되어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 감독 시절, 붉은 제국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보냈고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인 이스탄불의 기적과 안필드의 기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부 리그 통산 19회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잉글랜드 클럽 중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잉글랜드에서 유일하게 빅 이어를 영구 소장한 명문 클럽이다.
3. 위르겐 클롭 부임 이전: 공격수들의 영광과 불운
헤이젤 참사와 힐스버러 참사가 연이어 터지게 되고 그레이엄 수네스, 로이 에반스 감독 체제에서 리빌딩까지 실패했지만,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취임하며 부진이 어느정도 수습이 되는 듯 했다.
그것이 바로 2000-01 시즌 FA컵, 리그컵, UEFA컵, 커뮤니티 실드, UEFA 슈퍼컵의 5관왕으로 증명이 되었다.
프랜차이즈 스타 마이클 오언은 이때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
리그에서도 3위를 기록했지만, 오언과 에밀 헤스키 조합은 30골을 합작하며 스트라이커가 약하다는 평가는 받는 팀이 아니었다.
오언은 다음 시즌에도 19골을 터뜨리며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지만, 헤스키가 부진했고, 2위임에도 팀득점 67점으로 1위 아스날의 79득점, 3위 맨유의 87득점에 비하면 저조한 득점력을 보이기 시작하며,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잔혹사가 시작되었다.
2002-03 시즌을 앞두고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친 세네갈의 연쇄살인마라는 별명을 가진 공격수 엘 하지 디우프를 1000만 파운드에 영입을 했다.
전 소속팀인 리그앙의 RC 랑스에서도 두 시즌 동안 18골을 뽑아낸 검증된 공격수였고, 월드컵에서 세네갈을 8강으로 이끈 맹활약을 했기에, 기대를 모은 영입이었으나, 두 시즌 동안 리그 55경기에 나와서 3골, 리그컵 7경기 나와서 3골 총 79경기에 출전해서 6골을 넣는 최악의 부진을 선보이며, 결국 2004-05 시즌에 볼튼 원더러스로 임대를 떠났고, 거기서는 리그 9골을 터뜨리며 완전이적을 해버린다.
400만 파운드에...리버풀은 5위로 추락하여 다음 시즌 챔스도 못나갈뻔 했으나 그 시즌 챔스를 우승해버려서 챔스 티켓을 놓치지는 않았다.
유스출신인 오언 꾸준히 19골, 16골을 기록해주고 있었고, 2001-02 시즌에 320만 파운드에 영입했던 밀란 바로시가 2002-03 시즌 총 12골을 넣어주었다.
그런데,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마저도 시즌 종료 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퇴물 취급받던 에밀 헤스키마저 버밍엄 시티로 이적하게 되면서 리버풀의 공격진은 그야말로 멸망하게 되었다.
오언과 디우프가 사라진 2004-05 시즌 리버풀은 드디어 라파엘 베니테스가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미 공격진이 멸망된 상황. 바로시 혼자 분투한 시즌이었다.
지브릴 시세를 당시 리버풀 클럽 레코드인 1450만 파운드에 영입은 했지만, 영입한지 얼마 안 돼서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게 되었고, 두 시즌 동안 리그 13골의 그냥 그런 활약을 보였다.
유로 2004에서 맹활약하며 득점왕에 오른 바로시가 간신히 9득점을 올렸을뿐. 이스탄불의 기적이 아니었으면 진짜 멸망한 시즌이었다.
그러나 밀란 바로시 조차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을 부상으로 통째로 날려버렸다.
2004-05 시즌 때 닐 멜러라는 반짝 스타가 갑툭튀 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반짝 스타였을 뿐. 2006-07 시즌 팀의 득점력 강화를 위해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한창 물이 올랐던 상태의 디르크 카윗을 900만 파운드라는, 당시 리버풀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꽤 큰 금액으로 영입했다.
카윗의 활동량이나 팀 플레이는 수준급이었으나 정작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리그 12골로, 득점랭킹 9위에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리버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기에 실패한 영입이라고는 볼 수 없다.
리버풀을 떠난 지 오래된 지금도 마치 맨유의 박지성처럼 팀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주는 스타일인 그를 많은 콥들이 진심으로 좋아하며 레전드로 칭송하고 있다.
같은 시즌 6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뉴캐슬에서 크레이그 벨라미도 영입했지만 리그 7골로 빈곤한 득점력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대신, 바르셀로나와의 챔스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바르셀로나를 탈락시키긴 했다.
활약과 별개로 좋지 않은 인성과 말썽으로 시끄러웠던 인물이었던 그도 결국 다음 시즌 바로 팀을 떠났다.
결국 2007-08 시즌 이적시장에서 2000만 파운드라는 클럽 레코드를 기록하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토레스의 이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크레이그 벨라미, 지브릴 시세, 마르크 곤살레스, 루이스 가르시아, 플로랑 시나마-퐁골 등 준주전급 자원 여러 명을 이적시켜야 했고, 이는 당시 선두권 경쟁을 벌이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FC, 아스날 FC에 비해 얇던 스쿼드 두께를 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 초신성 공격수 토레스와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손꼽히는 스티븐 제라드 조합은 '제-토 라인'이라는 이름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페르난도 토레스에게도 이때가 자신의 축구 경력에서 가장 최고의 전성기 시절이었다.
네덜란드의 신성 라이언 바벨 역시 1,150만 파운드의 거금을 들여 영입했지만, 기대치에 비해 2007-08 시즌 전반기에 반짝 활약한 것 이외에는 이적료값을 하지 못한 영입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토트넘 홋스퍼에서 로비 킨을 데려왔으나 구단주와 감독 사이의 알력 등 클럽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6개월만에 반송 처리했고, 첼시에 토레스를 5,000만 파운드에 넘기고 무려 3,500만 파운드라는 패닉바이로 영입한 앤디 캐롤 역시 실패했다.
다만 AFC 아약스에서 2,650만 파운드로 사온 루이스 수아레스가 월드 클래스의 기량을 보여주며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잔혹사는 여기서 사라지는 듯 했으나 수아레스를 FC 바르셀로나로 보내고 대체자로 영입한 마리오 발로텔리, 리키 램버트, 크리스티안 벤테케가 죄다 실패하며 잔혹사는 계속 되었다.
더 문제인 것는 저 셋의 활약도를 다 합쳐도 다니엘 스터리지의 발 끝에도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런 스터리지마저도 잦은 부상에 발목이 잡힌다.
4. 상징
지금이야 리버풀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클럽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색이고, 100년이 넘는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러했으나, 19세기 말 갓 창단한 리버풀의 유니폼은 초창기 에버튼의 그것과 유사한 파랑-하양 디자인을 따랐다.
물론 이 유니폼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폐기되었으며, 1894년에 리버풀 시의 상징색이기도 한 빨강을 처음으로 유니폼 디자인에 채용하였다.
이때부터 1964년까지, 오늘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는 빨강(상의)-하양(하의) 디자인을 고수하던 리버풀은 당시 감독이던 빌 샹클리의 제안으로 하의와 스타킹까지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그(샹클리)는 온몸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게 상대에게 위압감을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드레싱 룸으로 들어와서 로니 예이츠에게 빨간색 하의 한 벌을 건네더니, "이거 한 번 입어봐라. 어떤지 좀 보자." 라고 했다.
로니가 빨간 바지를 건네 받고 챙겨 입자 그는 "오, 로니, 장난 아니게 멋진데? 놀라워.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네."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제안하길, "아예 양말도 빨간색으로 해 버리죠? 모두 빨간색으로 하고 나가요." 샹클리는 찬성했고, 그것이 리버풀의 새로운 상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안 세인트 존, 그의 자서전에서.다.
리버풀은 유니폼 상의에 메인 스폰서 로고를 부착하고 경기에 나선 잉글랜드 최초의 클럽이라는 독특한 기록도 보유하고 있는데, 1979년 히타치와 계약을 맺으면서였다.
그 후 리버풀은 크라운 페인트, 칼스버그 등을 거쳐 현재는 가슴에 스탠다드차타드의 로고를 새기고 있다.
한편 칼스버그와의 스폰서십 계약은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계약이라고 한다.
공식 구단 엠블럼 윗면에는 그 유명한 YNWA 문구가, 방패 안에는 리버풀 시의 문장인 라이버 버드가 자리해 있으며, 양쪽의 불꽃은 안필드 밖에 위치한 힐스보로 참사 기념비에 있는 성화를 표현한 것이다.
위의 샹클리 게이트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리버풀의 전설적인 명장, 빌 샹클리를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1982년 그의 사후, 부인이던 네시가 개회식을 하여 지금까지 안필드 홈구장을 지키고 있다.
그의 모습을 본뜬 청동상도 1997년에 안필드에 세워졌다.
'리버풀은 나를 위해, 나는 리버풀을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명언을 남긴 감독답게 그는 비록 모두의 곁을 떠났지만 말 그대로 리버풀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5. Allez, Allez, Allez
2010년대 후반부터 리버풀 팬들 사이에서 급격히 흥하고 있는 응원가이다.
주로 유럽 대항전 경기 때 많이 듣게 되는데 2018년과 2019년에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리버풀이 좋은 성적을 거두자 전세계의 팬들에게도 유명해지고 친숙해진 응원가다.
프랑스어로 '가자'라는 뜻인 중독있는 후렴구 Allez, Allez, Allez 부분을 떼창하는 것이 이 응원가의 백미다.
가사 내용을 보면 간단하면서도 리버풀에 대한 콥 팬들의 자부심이 녹아있다.
여러 번 제패한 유럽대항전 우승에 대한 이야기와 리버풀 클럽의 전성기를 열었던 전설적인 명장,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의 이름이 나와 있다.
사실 이 Allez, Allez, Allez 응원가는 리버풀 뿐만 아니고 여러 다른 클럽에서도 응원가로 쓰고 있다.
카디프 시티, 아스톤 빌라, 레인저스 FC, SSC 나폴리,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 FC 포르투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 클럽들에서 멜로디만 똑같게 하고 가사는 자신들의 클럽에 맞게 써서 부르고 있다.
특이하게도 레인저스는 후렴구가 Allez가 아니라 Woah Woah Woah이다.
그래도 멜로디는 역시 똑같다.
K리그 대구FC, 수원 삼성 블루윙즈 등의 클럽 역시 동일한 멜로디에 가사를 개사한 응원가를 사용하고 있다.
한편 위 동영상에서 노래를 부른 '제이미 웹스터' 뮤지션은 2019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린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광장에서 결승전 직관을 하기 위해 모인 수만 명의 리버풀 콥 팬들 앞에서 공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6. The Kop
콥(Kop)은 리버풀 FC의 서포터즈를 통칭해 부르는 단어이다.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를 가득 메운 콥들의 열정적인 응원은 리버풀에겐 큰 힘을, 상대편에겐 상당한 부담감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클럽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심이 유별난 것으로 유명한데 비록 리버풀에게 힘든 시련이 없지 않았지만 과거 오랫동안 유럽 최강팀으로 군림했던 영광스런 역사가 있기에 그 시절이 다시 재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리버풀 홈에서 열리는 경기는 거의 매진이 될 정도로 현지 콥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리버풀 서포터들이 정말 많이 홈구장을 찾아오며 리버풀 입장에선 든든한 서포터즈이지만 과거에 콥 출신의 훌리건들이 원인이 된 헤이젤 참사로 빈축을 사기도 했고 힐스버러 참사로 인해 많은 리버풀 서포터들이 희생되는 어둡고 아픈 역사와 관련되기도 하였다.
콥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1906년 리버풀이 두 번째 1부 리그 우승을 한 후 구단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 만든 스탠드에 보어 전쟁 때 많은 리버풀 출신 병사들이 전사한 곳의 지명인 스피온 콥(Spion Kop)을 추모의 의미로 붙인 것에서 유래한다.
1960-61 시즌에 2부 리그로 강등되었던 리버풀이 우승을 하며 1부 리그로 승격된 후 1962-63 시즌 블랙풀 FC와 시즌 첫 경기를 치렀는데, 이 당시 안필드에 입장한 5만 여명의 팬들 중 절반이 넘는 수의 관중이 골대 뒤의 스피온 콥 스탠드에 모여 리버풀을 외쳤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당시 최고의 인기인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덩달아 옆에 있던 다른 팬들도 같이 노래를 부르며 열정적으로 응원했고, 이런 열정적인 응원을 본 사람들이 스탠드의 이름을 따 리버풀의 서포터즈를 콥이라고 통칭하게 되었다.
리버풀 서포터즈, 콥들의 열정적인 응원의 대표적인 예시는 UEFA 챔피언스 리그/2018-19 시즌/4강 2경기 2차전 경기가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경기 킥오프부터 90분 추가시간 지나서 경기 끝날 때까지 바르샤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맹렬한 야유를 퍼부었고, 리버풀 선수들이 공을 잡게 되면 열렬한 환호와 응원 함성을 보내주었다.
경기의 분위기를 거의 콥들의 응원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리버풀은 이들의 용광로같은 기운에 힘입어 상대편에는 메시가 버티고 있고 3-0으로 열세에 빠져있던 상황을 4골을 집어넣어 역전시켜 버린다.
결국 그 시즌 마지막에 리버풀은 빅 이어를 들 수 있었고 리버풀 선수들은 이 영광을 이루게 해준 콥들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리버풀 관중 앞에 빅 이어를 내려놓고 선수들과 콥 모두 응원가를 부르는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7. 인기
자국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은데, 특히 동남아 쪽의 인기가 폭발적이다.
태국 전직 총리이던 탁신 친나왓이 리버풀 구단을 사려다가 실패하여 맨체스터 시티 FC를 대신 샀던 일화도 유명하다.
칼스버그가 유니폼 스폰서를 하던 시절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를 여행한 이의 경험을 들어 보면 맨유보다 리버풀 서포터를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이 두 나라에선 이슬람 율법 때문에 주류 관련 광고를 금지하는 터라 덩달아 칼스버그가 가슴팍에 새겨진 유니폼도 판매 금지가 되어 칼스버그가 스폰서를 하기 전 유니폼이 아직도 나와 팔리고 있다며 투덜거리던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전술했듯이 동남아쪽 인기가 많은 편이라 프리시즌 친선경기도 동남아에서 많이 가졌는데, 클롭 부임 이후 시즌 전 선수단 컨디션 관리를 위해 장거리 비행을 자제하는 쪽으로 방침이 세워져 동남아쪽 팬들의 아쉬움이 커질 전망이다.
참고로 이런 인기를 방증이라도 하듯이, 구단 공식 스폰서 9개사 중 2개사가 동남아시아 쪽에 뿌리를 둔 회사이다.
이집트 국가대표 에이스, 모하메드 살라가 리버풀에서 맹활약 하면서 이집트에서의 위상은 가히 국민 클럽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박지성이 한창 뛰던 맨유 클럽이 우리나라에서 가졌던 위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가 많은 보스턴에서 인기가 많다.
당장 공식팬클럽이 당당히 보스턴에 있는 건 물론이요, 펜웨이 스포츠 그룹이 소유한 보스턴 레드삭스 전담 방송사 NESN에서도 리버풀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 레드삭스 트윗 계정에서도 2018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전에 리버풀 응원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스탄불의 기적 이후로 입문한 팬들이 많은 편이다.
온,오프라인으로 팬클럽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규모도 꽤 큰 편이다.
2018년 9월에 'LFC 월드'란 이름으로 리버풀 공식 팬미팅 및 리버풀 경기 단체관람이 롯데월드타워에서 개최되었다.
리버풀 레전드인 루이스 가르시아, 사미 히피아, 제이슨 맥아티어가 내한했으며 잔디광장에 대형스크린을 설치해 리버풀 대 토트넘전을 중계하였다.
이날 리버풀은 토트넘을 2:1로 이겼으며 롯데월드타워는 이날 행사를 기념해서 리버풀 응원 문구와 리버풀 레전드 이름이 담긴 레이저쇼를 벌여 큰 환호를 받았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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