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디다스 슬리퍼 슈퍼스타 프로모션 코드 신발 이지 부스트 운동화 구찌 축구화 바람막이

by 채은아빠 2022. 6. 20.
반응형

1. 프로필

기업명 : 정식: Adidas AG, 한글: 아디다스 주식회사
국가 : 독일 (다국적 기업)
업종명 : 의류, 스포츠 장비
설립일 : 1924년 7월, 1949년 8월 18일
본사 : 독일 바이에른 주 헤르초게나우라흐
설립자 : 아돌프 다슬러
대표자 : 카스퍼 로스테드 (CEO)
시가총액 : 80조원 (2021년 9월 2일 기준)
상장, 상장여부: 상장기업, 상장시장: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
기업분류 : 대기업
종목코드 : FWB: ADS
이전 기업명 :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 (1924-1949)
총매출액 : 29조 2,308억원 (2018)
영업이익 : 3조 1,585억원 (2018)
순이익 : 2조 2,704억원 (2018)
총자산 : 20조 8,264억원 (2018)
총자본 : 8조 4,895억원 (2018)
직원 수 : 57,016명 (2018)
한국 | | |

2. 개요


Impossible is Nothing
아디다스(Adidas)는 독일의 스포츠 용품 브랜드이다.
특유의 3선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하다.
유럽 최대의 스포츠웨어 제조업체이며, 나이키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스포츠웨어 제조 기업이다.
운동화를 비롯해 의류나 액세서리를 비롯한 다양한 제품을 판매한다.

3. 역사

1900년, 아돌프 다슬러(이하 아디)는 독일 바이에른 주 헤르초게나우라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발 공장의 봉제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세탁소를 운영했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아디 다슬러는 섬유 가공, 신발 세탁, 제단, 제본 등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당시 독일의 신발 산업은 하향세였기에 아버지는 아들이 제빵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1920년 운동에 대한 열정이 강하고 자신 역시 운동 선수였던 아디 다슬러는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운동화 대신 내구성이 강한 운동화를 만들고 싶어 스무 살 때부터 어머니의 세탁실에서 혼자 트레이닝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설립자인 아디 다슬러는 형 루돌프 다슬러(이하 루디)와 함께 1924년, 뉘른베르크 인근 헤르초게나우라흐에 위치한 자택에서 축구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디는 뛰어난 손재주를 이용해 질 좋은 축구화를 만들어냈고, 외향적인 성격의 루디는 그런 동생이 만든 축구화를 팔기 위해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축구화 생산 주문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집에 돌아온 형 루디 다슬러는 동생의 신발 사업에 동참해 둘은 같은 해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Gebrüder Dassler Schuhfabrik)’을 설립했다.
훗날 아디다스의 전신이 된 이 회사는 아디 다슬러의 가족을 포함한 12명의 사람들이 매일 50켤레의 운동화를 제작하는 가내 수공업 형태였다.
아디는 조용하고 꼼꼼한 신발 개발자였고, 형 루디는 외향적인 성격의 세일즈맨이었기에 둘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 회사를 운영했다.
아디 다슬러는 자신이 만든 제품들을 선수들이 착용하기 전에 늘 테스트를 직접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좋은 제품을 선수들에게 제공하겠다던 그의 신조(Only The Best For The Athlete)는 지금도 아디다스 브랜드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인 역시 열정적인 운동 선수였던 아디는 선수들과 그들의 요구에 늘 귀 기울였다.
1924년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 공장 창업 후, 다슬러 형제는 운동 선수들을 위한 최적의 신발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아디 다슬러는 보다 더 가벼운 신발을 만들기 위해 저울을 들고 다니며 원단을 찾아 다녔고, 선수와 트레이너들을 직접 만나 자신이 만든 신발의 성능을 직접 테스트했다.
그 결과, 그는 딱딱한 가죽 대신 부드럽고 가벼운 고무 원단으로 대체해 운동화 제작에 사용했다.
이 고무 운동화는 아디다스 스포츠화의 효시였다.
1925년, 아디는 직접 손으로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개발해 특허권을 갖게 되었다.
이 신발들은 트랙과 필드에서 뛰어난 성능을 과시했는데, 특히 아디의 스파이크 러닝화가 처음 빛을 본 것은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였다.
리나 라드케(Lina Radke) 선수가 이 신발을 신고 여자 800m 달리기에서 세계 최고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한 1932 LA 올림픽에서 아서 요나스(Arthur Jonath)도 이 신발을 신고 육상 100m에서 동메달을 따면서 다슬러 형제가 만든 신발은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33년에 형제가 나치당 당원이 되면서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
다슬러 형제의 나치 경력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루디가 나치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던 반면, 신발 밖에 관심이 없던 아디는 그저 신발장사의 수단으로 나치당에 가입한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독일 국가 대표 선수들 대부분이 아디 다슬러가 만든 운동화를 신었고, 독일 올림픽 위원회는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겠다는 선수들의 요구에 따라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에서 스포츠화를 공급받았다.
아디는 이 당시 최고의 육상 스타이자 흑인 선수인 미국의 제시 오언스(Jesse Owens)에게 자신의 운동화를 보여주기 위해 바이에른에서 베를린에 있는 선수촌까지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디 다슬러는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보여주며 경기에서 신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결국 제시 오언스는 이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100m, 200m, 400m 계주와 멀리뛰기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해 베를린 올림픽 최고의 스타가 됐다.
제시 오언스가 신었던 다슬러 형제의 신발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흑인이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것을 싫어한 아돌프 히틀러를 엿먹인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의 신발을 제공함으로서 그 우승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를 신길 원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다슬러 형제는 매년 20만 켤레 이상의 운동화를 판매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길어지자 형제의 사업 여건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형제는 회사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루디는 아디의 아내가 회사의 경영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루디는 군대에 끌려갔지만 아디는 징집되지 않았기에 루디는 아디랑 제수가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를 썼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1945년 7월에 루디는 미군에게 잡혀 SS로 오해 받아 포로수용소에 1년 동안 감금된다.
루디의 소속 부대가 패전에 즈음하여 재편성되면서 SS에 배속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루디는 독일의 패전을 직감하고 탈영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이 때문에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다하우 수용소에 끌려가던 중 독일의 패전을 맞이하게 되고, SS의 최후의 발악으로 인해 총살당할 뻔 하였지만 독일군 트럭 운전사의 기지로 미군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미군에게 다시 체포된다.
루디는 이 모든 일이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석방되자마자 아디를 나치 협력자로 밀고했지만 아디는 유대인계 시장(市長)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았다.
결국 루디는 집에서 나와 강건너의 다슬러 공장을 차지했고, 그를 따르는 사원들을 데리고 독립했다.
아디는 자신의 이름과 성에서 글자를 따서 아디다스를 만들었고, 루디는 푸마를 만들었다.
이렇게 다슬러는 아디다스와 푸마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두 회사간의 화해는 200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둘 다 본사가 처음에 사업을 시작했던 헤르초게나우라흐에 있다.
참고로 ADIDAS의 뜻이 국내에선 'All day I Dream About Sports'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잘못된 사실로 실제 의미는 창립자 아디 다슬러 별명인 “Adi(Adolf)”와 성인 Dassler의 앞글자 “Das”의 6글자를 합친 것이다.
미국의 유명 뉴메탈 밴드 Korn의 대표곡 중 'A.D.I.D.A.S.(All Day I Dream About Sex)'가 있어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브랜드명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아디다스는 독일 기업인데 영어로 약어를 지었을 리가 없다.
사업가적 기질을 가진 루디와 달리, 아디는 기술자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디다스 설립 후 아디의 부인인 캐테 다슬러가 아디다스의 경영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아디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는 멜버른 올림픽에서 수완을 발휘한 이후 아디다스 프랑스의 매니저를 맡게 되는데 그는 야심가로서 보수적인 경영을 추구하던 부모와 충돌이 잦았고 독일의 아디다스 본사와 프랑스의 지사는 독립적으로 제품을 개발하거나 판매하여 사업상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9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 제화 회사를 대신하여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납품업체가 된 아디다스는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또 한 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서독 대표팀은 아디 다슬러가 만든 축구화를 신고 출전했다.
서독 대표팀은 조별 리그 2차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 팀에게 3대 8로 대패했다.
터키와 플레이오프(Playoff)를 치르며 힘겹게 8강에 오른 뒤 서독은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헝가리팀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서독의 우승을 점치는 이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경기 당일 변수가 생겼다.
경기가 벌어진 베른(Bern)에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경기 시작 이후 연속 두 번의 골을 넣어 주도권을 잡은 팀은 헝가리였지만, 폭우로 인해 그라운드가 진흙탕으로 변해가면서 축구화 바닥의 스터드(Stud, 징)를 교체할 수 있는 축구화를 신은 서독 팀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전반이 끝나고 스터드를 교체한 서독의 경기력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살아났다.
2대 2 동점이었던 후반 39분, 헬무트 란(Helmut Rahn)이 결승골을 넣으며 헝가리를 무너뜨렸다.
이 승리는 서독의 승리이자, 아디다스 기술의 승리였다.
패전국으로 의기소침하게 살아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대표팀의 월드컵 우승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후에 이 일화는 『베른의 기적(The Miracle Of Bern)』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영화에는 아디 다슬러가 축구화의 스터드를 교체할 수 있다는 걸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월드컵을 통해 아디다스는 축구 전문 브랜드로 급성장하게 되었고 독일 대표팀이 신었던 아디다스의 징 박힌 축구화(Sports Shoe With Screw-In Studs)는 전 세계적으로 주문이 쇄도해 한 해 45만 켤레 넘게 생산됐다.
1960년대 중반부터 아디다스는 스포츠 의류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했고, 1963년에는 축구공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디다스의 텔스타(Telstar)가 공인구로 사용되면서 아디다스 축구공은 모든 FIFA 월드컵의 공인구로 채택됐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아디다스는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일류 선수가 아니다’라는 말이 선수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스포츠 용품 분야에서 독주했다.
1978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디 다슬러의 뒤를 이어 다슬러 가문의 경영이 시작됐다.
아디 다슬러의 사망 6년 후 아디 다슬러의 아내 카데 다슬러(Kathe Dasselr)의 사망으로 그녀의 경영이 막을 내렸다.
이후, 아디다스 CEO 자리에 아디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Horst Dassler)가 올랐다.
그는 스포츠 용품 전반으로 사업 범위를 무리하게 확장했고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아디다스 물품 독점 계약에 열을 올렸다.
아디 다슬러가 살아있었을 당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던 호르스트 다슬러는 스포츠화 제작에 주력했던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토털 스포츠 용품 사업으로 진출하려는 욕심이 많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을 피해 프랑스 법인으로 도망가다시피 했는데 이 때 호르스트 다슬러는 아레나(Arena)라는 수영 전문 브랜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런 마케팅으로 그는 스포츠 마케팅의 1인자가 되었다.
또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농구화 슈퍼스타는 농구선수들의 대호평을 받으며 아디다스는 미국 시장까지 석권했다.
심지어 마이클 조던은 어렸을 때 나이키보다 오히려 아디다스 농구화를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유행에 둔감한 채 전문적인 스포츠 용품에만 관심을 가짐으로 인해 일반 소비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점과 결국에는 아디다스 전체의 경영을 이어받게 된 호르스트가 무리하여 미국 총판의 영업권을 구입해버린 점 등으로 인해 회사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진 점 등으로 인하여 결국 아디다스는 혜성같이 등장한 나이키에 그 지위를 빼앗기고 아디다스는 마당의 잔디를 깎을 때 아저씨들이 입는 옷으로 인식될 정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87년 호르스트가 사망하면서 가족 경영은 사실상 끝을 고했다.
아디다스를 창립한 아디 다슬러 가문의 가족 경영 체제를 대체하고 큰 재정 문제에 빠진 아디다스를 살리기 위해 1990년 전문 경영인 베르나드 타피에(Bernard Tapie)가 새로운 CEO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창립자 아디 다슬러와 더불어 현재의 아디다스를 만든 주역이다.
아디다스는 이 시기 본업인 스포츠가 아닌 다른 곳에서 명성을 쌓는다.
바로 패션. 힙합의 시조격인 전설적인 그룹 Run DMC가 아디다스의 파이어버드 저지를 입고 슈퍼스타, 캠퍼스 등의 스니커즈를 신고 활동하면서 아디다스는 언더그라운드 문화, 스트리트 패션의 아이콘이 된다.
Run DMC는 아디다스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My Adidas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는데, 당연히 아디다스는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고 이 노래는 화면과 라디오를 타고 엄청난 파급효과를 주었다.
당시 런 디엠시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중절모와 아디다스 운동화는 전 세계 힙합퍼(Hiphoper)들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됐다.
아디다스가 제작한 런 디엠시 라인의 시그니처(Signature) 제품들은 전 세계로 팔려나가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이 나이키(Nike)에게 벌어다준 만큼의 수익을 아디다스에게 안겨주었다.
아디다스의 트레이드마크인 삼선 트레이닝 복을 비롯한 아디다스 의류의 시작은 베르나드 타피에의 노력의 결과라는 평을 받고 있다.
런 디엠시와 아디다스의 콜라보레이션은 선수들을 위한 스포츠 브랜드에 국한되어 있던 아디다스의 이미지를 대중적인 브랜드로 확장시켜 주었다.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아디다스는 1997년 동계 스포츠 용품 제조사인 살로몬(Salomon)을 인수했고 회사 이름을 아디다스 살로몬(adidas Salomon)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2005년 살로몬 사업 부문을 핀란드의 아머 스포츠(Amer Sports)에 매각하면서 회사명을 다시 아디다스로 변경했다.
아디다스는 이에 힘입어 차후 스트릿 패션에 주력하는 Adidas Originals 라인을 생산하게 되고, 많은 셀러브리티와 디자이너의 콜라보레이션 등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
폴 매카트니의 딸인 여성복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가 디자인한 라인이 특히나 유명하며, 2010년대에는 제레미 스캇이 내놓은 라인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오리지널스 라인은 대개 복고풍의 트렌디한 패션을 주도했고, 덕분에 아디다스는 패션 분야에서만큼은 점유율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이키를 이기고 있다.
그러나 한동안 아디다스는 본업인 스포츠 분야에선 여전히 심각한 부진을 겪는다.
적어도 축구에서는 1인자라는 자부심이 있었으나, 뒤늦게 축구시장에 뛰어든 후발주자 나이키가 'R9' 호나우두를 내세워 축구산업에 전념하면서 야금야금 점유율을 내주더니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축구에서도 2인자로 밀리게 됐다가, 2010년대 들어와서 다시 1인자로 올라섰다.
아디다스가 신경을 쓰지 않던 골프 분야를 나이키가 타이거 우즈를 내세워 대박을 터트리면서 아디다스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에 절치부심하던 아디다스는 나이키의 Just Do It 캠페인을 구상한 인재들을 영입하여, Equipment 브랜드를 런칭하고 로고를 기존 불꽃 모양의 트레포일에서 삼각형의 로고(바로 이 페이지 맨 위의 로고, 트레포일은 패션라인인 오리지널스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제한.)로 교체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잘 써먹는 Impossible is Nothing도 이때 나온 것.결국 아디다스는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거대한 미국 시장을 홈그라운드로 하는 나이키에게 밀려서 스포츠용품 업계의 콩라인이다.
아디다스가 나이키를 넘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2014년 미국 매출액만 보더라도 나이키 118억달러, 언더 아머 26억달러, 아디다스 16억 달러로 아주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미국 점유율이 매년 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해보였으나, 아디다스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2015년 등장한 울트라부스트를 시작으로 이지 부스트, NMD 등 부스트 중창을 장착한 신발들이 나오고 튜블라 라인도 히트를 치면서 2016년 3분기에는 언더아머를 다시 제쳤다.
사실 북미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밀려서 그렇지 아디다스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는 아직도 우세한 편이다.
아디다스는 나이키를 넘기 위해 수많은 유명 디자이너들의 영입으로 패션 분야의 지분을 점차 늘려가며 굳히기에 들어가고 있고, 축구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기존의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에 이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벤투스, 올림피아코스 FC와의 대형계약을 맺어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의 최정상 클럽을 모두 스폰서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또한 2014 브라질 월드컵에 만들었던, All in or nothing 캠페인에서 마침내 나이키를 이기면서 꿈도 희망도 없던 2000년대 중반에 비하면 미래가 긍정적인 상태다.
2006년, 리복을 인수해 북미 시장 점유율을 끌어 올린 아디다스는 2011년엔 아웃도어 전문 브랜드 파이브텐(Five Ten)과도 합병했다.
2013년, 아디다스는 3년에 걸친 연구 개발 끝에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신소재인 부스트(Boost)를 개발해 에너지 효율이 뛰어나고 쿠션감이 좋은 운동화 에너지 부스트(Energy Boost)를 런칭했고, 2014년에는 브라질 월드컵 공인구인 브라주카(Brazuca)와 함께 새로운 축구화 배틀팩(Battle Pack)을 선보였다.
2001년부터 CEO를 맡고 있던 헤르베르트 하이너가 물러난 이후, 2016년 카스퍼 로스테드가 CEO로 부임한 이래 업계 1위 탈환을 목표로 아디다스는 본격적인 체질 개선에 들어갔고, 다시금 상승세를 타고 있다.
로스테드는 공장을 독일로 옮겨 전자동화를 도입, 인건비를 대폭 낮추었다.
아디다스는 2015년 3억100만켤레의 운동화를 생산했고, 2020년까지 매년 3000만켤레씩 생산을 늘려 나갈 전망이다.
아시아의 인건비가 상승하고 로봇 생산비가 낮아짐에 따라, 유럽과 미국 등에 로봇 공장을 설립하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패션 업계에서는 24시간 생산이 가능한 로봇 공장이 최신 트렌드를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유통하는 패스트 패션에 적합하다고 본다.
유럽과 미국 등 소비시장과 가까워 아시아에서 생산해 운송하는데 따른 비용과 시간,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줄일 수 있다.
경쟁사인 나이키 역시 로봇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 브랜드 이미지 재고를 위해 스폰서십을 대폭 손보았으며, 셀러브리티와의 스폰서십을 강화하여 애슬레저 시장을 선점하였다.
그 결과 아디다스는 북미 지역의 점유율을 빠르게 회복했으며, 2017년에는 중국 시장에서 29% 성장, 북미 지역에는 27% 성장세를 보였다.
2017년 아디다스의 영업이익은 무려 219% 증가하는 등 경쟁사 나이키를 다시 바짝 추격하고 있다.
여전히 나이키의 어패럴 브랜드 순위가 1위지만, 나이키의 평가 가치가 몇몇 악재로 2018년 -12%를 기록한 반면, 아디다스는 무려 41%가 성장하여 4위를 기록한 상태이다.
2019년에는 17% 성장하며 3위를 기록했다.
2018년에도 연매출 19억1000만 유로의 매출을 올린 아디다스는 특히 두 주요 시장에서 성장했는데, 북미 매출은 46억 8000만 유로로 10% 증가, 아시아-태평양지역은 71억 4000만 유로로 12% 증가했다.
특히 중국 내 매출 증가율은 23%에 달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매출액이 1% 감소해 최대 58억8000만 유로, 중남미에서는 14%로 떨어져 16억3000만 유로에 머물렀다.
부문별로 보면 신발은 매출 1,278만 유로로 2017년 대비 3% 증가했다.
그러나 스포츠 장비는 6%로, 매출 822만 유로의 상승률로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인 상품이었다.
2018년 아디다스는 온라인 매출을 늘리고 오프라인 매장을 줄여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카스퍼 로스테드 CEO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온라인 매출을 오는 2020년까지 현재의 2배가 넘는 40억 유로까지 늘리기 위해 디지털 분야의 투자를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2017년 아디다스의 온라인 매출은 전년 대비 57% 증가한 16억 유로를 기록한 바 있다.
그는 "웹사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매장 중 하나다"라며 "직원을 고용하고, 회사 자원을 배분하고, 기반시설을 지을 때 가장 우선순위로 작용한다"고 전했다.
아울러 로스테드 CEO는 2019년까지 오프라인 매장을 소폭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2018년 초 미국 애틀랜타에 세운 두 번째 스피드 팩토리에서도 운동화를 생산한다.
뉴욕과 같은 도심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운동화다.
아디다스는 2020년까지 독일과 미국에 있는 두 개의 스피드 팩토리에서 각각 연간 100만 켤레의 운동화를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021년 8월. 아디다스가 미국의 어센틱 브랜즈 그룹에 25억 달러(약 2조9천억 원)를 받고 리복을 넘기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4. 라인과 활동

오리지널스 라인의 신발들이 2010년대 들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중 1980~90년대 스타들이 신고 다니던 모델을 현대적으로 복각한 '슈퍼스타', '가젤', '스탠스미스', '캠퍼스', ‘나이트 조거, 'EQT', 'ZX', ‘슈퍼코트’ 시리즈 같은 모델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과거의 블라 라인도 복각해서 역시 인기를 끈 이후,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내놓고 있다.
'Y-3'와 '이지' 라인의 디자인을 적절히 차용한 점이 주효한듯 하다.
부스트 폼을 전격적으로 사용한 신설 NMD(노마드) 라인업도 대박을 치면서,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퍼포먼스 라인에서도 특유의 가벼움, 편안함을 가지는 부스트폼을 내세운 '울트라부스트', '퓨어부스트' 등이 대박을 치면서 러닝화 시장을 재편하고 있고, 농구화나 야구화, 축구화 등의 신발에도 점차 부스트폼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2017년 기준 아디다스를 하드캐리하는 것은 부스트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서브캐리는 나이키의 플라이니트 격인 프라임니트 정도. 다만 부스트폼에 대한 리뷰들을 보면 편안함, 쿠션감은 대체로 호평하고 있으나 이런 편안함이 장기적으론 오히려 발에 무리를 주는 것 아니냔 의견도 있다.
예를 들어 침대나 모래사장에 서있을때 처음엔 편안하지만 장시간 서있을 경우 도리어 불편한 것처럼 말이다.
장거리보단 단거리 보행용에 아무래도 적합하지 않겠냐는 것. 하지만 부스트 몇년간 잘만 신고 있다는 사람들도 있는걸 보면 개인차는 있을듯. 또 같은 이름의 신발이라도 개선된 버젼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2022 카타르 월드컵을 기점으로 로고에서 'adidas' 레터링을 제외한 로고를 사용할 준비를 하고있다.
이미 2021년에 내놓은 의류 제품 중에는 삼선 로고만 있는 의류를 출시한 적이 있으며 카타르 월드컵 이후로는 모든 제품과 마케팅에 적용될 예정이다.
아디다스는 운동화 뿐만 아니라 패션 라인에서도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힙합 문화와 상호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래퍼들이 아디다스의 옷이나 신발을 애용한다거나, 국내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언프리티 랩스타에 아디다스가 협찬을 하는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옷 스타일들이 꽤나 힙합스럽다.
스트리트 패션에서 아디다스가 한가닥 하는 이유. 아예 오리지널스 라인은 이런 스트릿 위주로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이렇게 오리지널스 라인에서 선전하다가 대박을 친 예 중 하나가 바로 카녜 웨스트와의 협업인데, 나이키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아디다스로 초대형 이적 후 출시한 이지 부스트 라인은 아디다스 협업의 레전드로 남으며,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카녜가 원하는 모든 사람이 이지 부스트를 신을 수 있게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여전히 재판매는 소량에 그쳤다.
이지 부스트 시리즈가 성공하게 되면서 비슷한 색상들을 마구 찍어 내고 있지만, 나오는 족족 품절된다.
아디다스는 카녜와 공동으로 제작한 이지 라인으로 2019년 15억 달러, 한화로 약 1조 8,168억 원 정도의 수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카녜는 매출액의 5%를 로열티로 받는데, 2019년에는 6,500만 달러, 한화로 약 753억 원 가량 벌 것으로 추측된다.
덕분에 비록 스포츠 분야에서는 콩라인 확정이지만, 패션 부문에서는 2010년대 기준 나이키보다 매출이 앞서고 있다.
미시 엘리엇은 2000년대 중반쯤 대박을 쳤고, 2010년부터 2~3년간은 제레미 스캇과의 콜라보레이션이 핫했으며, 이후는 상기했다시피 카녜 웨스트와의 협업이 가장 뜨거운 관심사였다.
2018년에는 배우 겸 래퍼인 도널드 글로버와 아디다스 오리지널스가 파트너쉽을 체결했고 2019년 그가 디자인한 스니커즈가 발매됐다.
2019년에는 팝스타 비욘세와 파트너쉽을 체결했다.
비욘세는 자신의 의류 브랜드 ‘아이비 파크(IVY PARK)’를 아디다스와 손잡고 재론칭한다.
그녀는 앞으로 아디다스와 함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새로운 시그니처 신발과 의류를 개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외에 유명한 마케팅은 역시 1년마다 바뀌는 축구공. 시즌이 바뀌면 지난 축구공을 단종시키고 새 모델을 내놓는다.
2010년대 후반 기준 라리가는 푸마, 프리미어리그는 나이키가 지원하고 있지만, 이 리그들의 상위팀 경쟁인 UEFA 챔피언스 리그의 공인구와 남/녀 월드컵, 올림픽 축구,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해 바뀌면 컨페더레이션스컵 순으로 FIFA 파트너인 아디다스의 후원이 붙는 국제대회는 계속 진행되기 때문에 생각보다 나이키가 파고들기 쉽지 않다.

5. 국내 마케팅

아디다스가 1977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 스폰서로 처음 선정된 스포츠용품사란 것은 생각보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다만 지금처럼 거액을 축구협회에 주고 독점 스폰서십을 맺은 것은 아니고, 유니폼을 비롯한 용품들 협찬 수준으로 대략 1984년까지 당시 아식스, 위크엔드, 코오롱 스포츠, 프로스펙스 등과 함께 협찬을 했다.
대한축구협회가 나이키에게 국대 유니폼으로 아디다스를 고를까 말까 떡밥을 던져 유리한 국대 스폰서 계약 연장을 이끈 것도 알려진 사실. 그렇지만 아디다스는 나이키랑 다르게 K리그 뿐만 아니라, 역도, 핸드볼, 유도, 태권도, 테니스, 양궁 등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 대표팀들의 후원사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 편이다.
K리그의 경우, 부산 대우 로얄즈, 천안 일화 천마, 안양 LG 치타스, 부천 SK,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부산 아이파크, 울산 현대 등이 아디다스와 공식 스폰서 계약을 맺었던 역사가 있다.
특히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2012년부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B레벨로 승격하여 아디다스가 스폰서를 하고있는 유명 유럽 축구팀과 동급으로 되어 유니폼 제작을 본사에서 직접 제작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2012년 아디다스 본사의 첫 작품인 블루 피버 유니폼이 출시 하루만에 매출 1억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2012년부터는 K리그 공식 스폰서로도 참여하고 있다.
2020년 현재 리그 차원의 스폰서십 계약을 맺고 있지만 본사의 글로벌 마케팅 정책에 따라 201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수원 삼성, 울산 현대, 부산 아이파크와의 스폰서쉽이 종료되고 구단에 대한 공식 유니폼 및 용품 스폰서에서는 발을 뺀 상태다.
부산 아이파크는 2020시즌 아디다스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공식 스폰서십이 아니라 서드파티 형태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계약하였다.
2020년부터 K리그 팀 후원에 다시 참여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실제 기사도 났었는데 해당 유력팀이 전북 현대 모터스와 울산 현대다.
2021년 1월 9일자 서호정 기자의 유튜브 라이브에서 현대가 두 팀이 모두 험멜과 작별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여 이 기사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2021년을 마지막으로 두팀과 험멜의 계약이 완전히 종료되는 만큼 2022년에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그리고 2022년 1월 5일에 드디어 울산 현대와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스폰서쉽 계약 오피셜이 나왔다.
야구에선 2010~13년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용품 스폰서를 한 경험이 있다.
그 전에는 한화 이글스, SK 와이번스나 LG 트윈스와 스폰서 계약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유니폼 상의에 아디다스 로고가 들어간 것은 롯데 자이언츠가 처음이다.
아디다스용품을 사용하는 선수들을 보면 오재원, 허경민, 강경학, 이진영, 김선빈, 손아섭 김용의, 진갑용, 최경철, 야마이코 나바로, 김재호, 에릭 테임즈, SK이재원, 적토마 이병규, 서건창이 있고, 2015년 이전시기를 보면, 이대호, 이승엽, 이재학이 대표적이었다.
2017년을 끝으로 축구도 철수하면서 여름 프로 스포츠와는 완전히 이별. 참고로, 많은 브랜드 들이 그렇지만 아디다스 역시 미국식 야구 제품 라인과 일본식 야구 제품 라인이 별도로 전개되고 있다.
대부분의 국내 스폰 선수들은 일본식 라인의 배팅 장갑을 사용하는 듯. 야구화의 경우도 역시 일본식 라인이 강세였으나, 2015년도에는 부스트폼을 사용한 미국식 야구화를 착용하는 선수들도 많다.
암가드는 국내의 NINE 스포츠를 통해 OEM 방식으로 제작, 선수들에게 공급한다고 한다.
KBL에서는 조성민이 모델로 활약하고 있고, 이승현도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아직까지 프로농구와 후원계약을 한 적은 없지만, 14-15시즌 초기에 경기장 바깥 라인에 있었던 바닥광고에 있었던,(그러니까 TV 중계화면 기준으로 왼쪽 윗 구석에 있었던) 나이키 로고를 치우고 아디다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니폼의 경우에는 여러 팀들에게 후원했거나 하는 중이다.
서울 삼성 썬더스는 2011년까지 후원하다 14-15시즌 다시 아스토레에서 아디다스 제품을 사용했고, 안양 KGC인삼공사는 2011년까지 후원. 부산 kt 소닉붐는 과거에 후원하다 계약종료 후 13-14시즌부터 15-16시즌까지 다시 계약. 고양 오리온스는 13-14 시즌부터 19-20 시즌까지 후원했다.
오리온스는 팀 특유의 색깔을 버리고 보라색으로 변신했는데 유니폼들의 퀄리티가 영 안 좋다.
또한 과거에는 허재가 뛰었던 시절의 원주 TG 삼보 엑서스(현 원주 동부 프로미)가 아디다스 제품을 사용했었다.
따라서 한국 프로에서는 농구에서만 아디다스 유니폼을 볼 수 있었다.
e스포츠의 경우 DWG KIA가 2021년부터 아디다스의 후원을 받기 시작했으며 2022년부터는 K리그의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이후로 한국 최초로 B클럽으로 승격되어 아디다스 본사가 직접 관여하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블랙핑크 멤버들 전원이 아디다스의 글로벌 앰버서더이다.

6. 해외에서의 마케팅

독일을 비롯하여 스페인, 일본, 알제리, 스웨덴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코틀랜드, 웨일스, 이집트, 벨기에,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모로코, 멕시코, 캐나다,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헝가리 등 국가의 축구대표팀이 아디다스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유럽이 강세를 보이는 종목은 아디다스의 지배력도 크다.
예를 들어 펜싱에서는 이탈리아의 남자 사브르 슈퍼 스타인 알도 몬타노나 플뢰레 여제인 발렌티나 베찰리를 후원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펜싱 대표팀 유니폼의 제조업체는 카파다.
그 외에도 독일, 프랑스, 중국, 그리스, 헝가리 등의 국가대표팀에는 선수 전원에게 용품을 제공한다.
한국의 펜싱 국가대표팀도 아디다스가 용품 후원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나이키가 타이거 우즈를 후원하면서 나이키 골프를 런칭해 재미를 보자, 이에 자극받았는지 아디다스는 세르히오 가르시아를 내세워 골프 사업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아디다스의 로고가 붙은 제품을 내놨으나 2000년대 초반에 테일러 메이드를 인수하여 골프 시장에서도 나름 입지를 굳히고 있다.

7. 유럽







FC 바이에른 뮌헨, 함부르크 SV,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 C.F., 발렌시아 CF, 유벤투스 , 올랭피크 리옹, 벤피카, AFC 아약스, RSC 안데를레흐트, FC 바젤 등의 유럽 명문구단들이 아디다스와 계약을 체결한 상태이다.
아디다스의 본고장 1. 분데스리가의 경우 FC 바이에른 뮌헨한 팀 뿐이다.
2부리그에는 함부르크 SV가 있다.
최근 독일의 뉘른베르크와 뒤셀도르프가 아디다스와 계약을 발표했는데 아디다스와의 직접 계약이 아닌 독일의 스포츠 중개업체 11teamsports를 통한 서드파티 계약이다.
이전에는 주로 나이키와 독일팀 간 계약을 담당했는데 두 팀을 시작으로 아디다스와의 계약도 늘릴 것으로 보인다.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VfL 볼프스부르크, FC 샬케 04가 과거 아디다스와 계약을 맺었었다.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에는 풀럼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스터 시티 FC 등이 있다.
몇 년 전까지 리버풀 FC와 뉴캐슬 유나이티드도 오랫동안 아디다스를 입기도 했다.
또한 2015-16시즌부터는 맨유와 10년간 약 1조 3000억에 달하는 대형 계약을 체결하여 나이키를 밀어내고 다시 킷 서플라이어로 나섰고, 이탈리아에서는 유벤투스와 6년간 2000억 계약을 맺으면서 15-16시즌부터 후원사로 나섰다.
정확한 계약기간과 금액은 나오지 않았지만, 올림피아코스 FC도 2015-16시즌부터 아디다스의 후원을 받는다.
그리고 19-20시즌부터 아스날 FC도 후원을 받는다.
그리고 UEFA 챔피언스 리그의 공인구도 제작하고 있다.

반응형

댓글